감귤류 약재 전의감·혜민서 전담…국가 보건의료 기여
감귤류 약재 전의감·혜민서 전담…국가 보건의료 기여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6.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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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제주 과원의 설치와 그 성격(8)
부사정 임원준의 의학 편의 관련 조정 건의사항 수록 기록 2쪽(단종실록-권1.-단종-즉위년-5월-25일조)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는 국가의 보건의료에 널리 쓰였다. 이는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를 수납했던 기구를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달 4일 본란에 게재된 <표>를 보면,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는 전의감(典醫監) 및 혜민서(惠民署)와 관련됐음이 드러난다. 이들은 제주목ㆍ정의현ㆍ대정현에서 각각 상납한 진피와 청피를 거둬들인 중앙정부의 수납기구였다. 한편, ‘歲抄’(세초), 곧 매년 12월에 행하는 진상에 대해서는 진피, 청피, 귤씨, 귤잎, 지각, 지실과 같은 약재류가 상납된다는 사실만 나올 뿐, 이들의 수납기구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세초’ 관련 진상의 약재류는 내의원(內醫院)으로 수납됐음이 분명하다. 진상품은 왕의 사용 등에 이바지하고자 궁중에 조달됐거니와, 내의원이 어약(御藥), 곧 왕의 약을 조제하던 관부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가 상납되면, 내의원ㆍ전의감ㆍ혜민서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구는 조선초기부터 보건의료행정기구이자 보건의료기구로도 운영됐다. 그래서 조선의 보건의료구조와 그 운영은 이들 3개 기구의 삼의사(三醫司)체제로 이뤄졌다고 본다.

삼의사 가운데 내의원은 왕실의료기관으로 종종 내약방(內藥房)으로도 일컬어졌다. 여기는 어약 제조가 가장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때때로 전의감과 함께 궁중은 물론, 종친 및 2품 이상 고위 관직자의 의료에도 나섰다. 또한 왕의 특명으로 도성내 병자의 치료, 혹은 전염병 발생 때 도성 밖으로의 의료활동에도 나섰다. 내의원의 의료활동은 꽤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이뤄지기도 했던 것이다.

전의감은 삼의사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여기는 국가의 의료사업에 가장 광범위하게 관여했던 한편, 궁내용 의약을 공급ㆍ하사하는 일도 맡았던 곳이다. 내의원이 독립된 이후에는 하사되는 약의 조제만을 맡았다. 전의감은 양반계층의 의료를 주로 담당했다고 하겠다.

혜민서는 서민의 의료와 향약의 전매를 맡았다. 여기는 대민보건의료기구였던 것이다. 주 임무가 서민의 질병치료였으나, 혜민서의 소속원은 타 기관, 혹은 외방으로 파견ㆍ배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심약(審藥)의 경우도 혜민서에서 파견했다. 혜민서는 심약을 각 도의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의 15곳과 함께, 제주 지역의 제주목에도 보냈다. 이들 16명의 심약은 각 파견지 관내의 진상약재를 심사하는 한편, 지방의 관원과 서민 및 군사의 의료도 맡았던 의원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정부는 초창기부터 향약 이용의 1차 의료시스템 구축을 지향ㆍ실현해 나아갔다. 특히, 세종의 경우는 1424년(세종 6) 이래 국내에서 산출되는 향약을 지역별로 파악하는 한편, 이들 약재의 수세와 관련한 토대도 마련했다. 이후 『향약집성방』이 1433년(세종 15)에 편찬ㆍ발간됨으로써 향약 이용의 1차 의료시스템을 구축하게 됐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동안 중국으로부터 사들여왔던 약재, 곧 ‘唐藥’(당약)의 수입과 사용을 지양하려는 분위기도 고조돼 나아갔다. 그 예로 행부사정(行副司正) 임원준(任元濬)이 1452년(단종 즉위년)에 “당약을 덜 쓰고 새로 향약을 써서 혜택을 베푸소서”라고 조정에 건의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당약’은 민간에서 구하기가 힘들고, 또한 가격도 고가임으로 『향약집성방』에 실린 향약을 써야한다는 등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나온다.

조선정부는 향약 이용의 1차 의료시스템을 구축하는 가운데 내의원ㆍ전의감ㆍ혜민서와 같은 3대 의료기구도 개편ㆍ정비해 나아갔다. 그래서 이들 기구가 각 지역으로부터 향약도 상납 받고, 이를 국가의 보건의료에 썼다. 그 가운데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 특히 진피와 청피의 경우는 내의원ㆍ전의감ㆍ혜민서에서 모두 각각 수납했음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매해 내의원은 진피 48ㆍ청피 30근, 전의감은 진피 5ㆍ청피 15근, 혜민서는 진피 50ㆍ청피 40근을 거둬들였다. 이로써 제주의 진피ㆍ청피는 왕과 지배계층뿐만 아니고, 서민의 의료에도 쓰인 향약이었음이 드러난다. 특히, 혜민서에서 가장 많은 양의 진피ㆍ청피를 거둬들였다. 이는 혜민서가 가장 많은 사람의 의료를 담당했던 기구이고, 또한 혜민서 관할의 전매청(專賣廳)이 각 지역으로부터 거둬들인 향약을 서민에게 판매한 점도 작용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때 제주 지역에서 상납한 진피ㆍ청피의 수납기구를 보면, 이들이 약재로서 두루두루 제공ㆍ이용됐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주 감귤류 열매가 상납되면, 가장 많은 물량이 진피ㆍ청피의 가공에 들어갔다고 본다. 이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해 제주 감귤류 열매의 상납물량이 민폐를 야기할 정도로 많아졌을 것이다. 반면,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가 국민보건의료에는 기여함이 컸다고 하겠다. 이에 걸맞은 대가가 제주 사람에게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좋은 진피의 가공·저장을 위해 말리는 법-수분 제거·효조작용 억제 온도 중요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약재는 모두 다 수분을 함유한다. 이들 수분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약재의 성분과 직접 강하게 결합돼 있는 것으로 결합수(結合水)라 칭한다. 다른 하나는 약재 속 빈틈에 존재하고, 온도ㆍ습도 등의 변화에 따라 이동하거나 증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자유수(自由水)라 부른다. 이들 가운데 미생물은 자유수를 이용하고, 그 결과로 부패해 곰팡이 등도 생겨난다. 이 때문에 약재의 수분도 자유수에 해당하는 수분의 비율을 낮추는 쪽으로 증발시켜 말리는 방법이 사용되는 것이다. 이를 건약법(乾藥法)이라 한다.

한편 귤껍질은 까거나 자르면서 껍질세포에 상처가 난다. 이로써 세포 안에 들어있는 산화효소와 폴리페놀(polyphenol)이라는 배당체, 곧 당(糖)과 다른 유기화합물 결합의 물질이 나온다. 이어 귤껍질이 공기에 닿으면 효소에 의해 폴리페놀이 산화되면서 거무스름해지고, 그것이 항산화물질로서 면역기능을 증진시키는 껍질세포 내 폴리페놀에게도 손상을 줄 수 있다. 이를 방지코자 방출된 효소와 폴리페놀을 물로 씻어내는 것이다.

또한 효소의 경우는 반응이 대략 35~40℃에서 가장 활발하다. 이 범위를 넘으면 효소단백질이 변성되기 시작해 반응속도가 오히려 느려지고, 일정 온도 이상이면 더 이상 작용치 않는다. 곧, 효소의 반응을 없애려면, 약재를 용기에 넣고, 130℃ 이상의 불을 사용해 말리면 용기의 온도가 40℃를 넘게 됨으로 효소는 반응속도가 급감하는 한편, 점차 활동도 멈추게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35℃ 이하의 저온에서 건조, 혹은 가공하더라도 약재의 색이나 맛이 변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방향(芳香)도 유지된다.

자연건조의 경우는 35℃ 이하의 볕, 또는 그늘에서 말린다. 특히, 그늘에서 천천히 말리면 정유성분의 손실이 또한 줄어든다. 곧, 진피는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용기를 40℃ 이상 되게 덥혀 가공한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0세기 후반 ‘태평성혜방’에는 “밀가루가 노랗게 될 정도로 볶는다(麵炒黃)”라고 하듯이, 볶는 온도가 제시됐다. 이 경우의 온도는 40℃이다. 건조기를 사용할 경우에도 건조실내 온도가 40℃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진피의 가공ㆍ저장에서 온도설정은 약재의 수분제거와 효소작용의 억제, 더 나아가 주요성분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자못 중요하다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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