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기억 속 남은 눈물과 환희, 제주문화 길 되다
흐릿한 기억 속 남은 눈물과 환희, 제주문화 길 되다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6.13 1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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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안방 차지로 문 닫는 극장 속속…자동차극장 깜짝 등장 볼거리
1966년 해외 홍보를 목적으로 한 문화영화 ‘제주도’를 제작하기 위해 해녀들을 촬영하고 있는 모습

[제주일보=고현영 기자]  ‘선생님은 어제의 얄개, 너와 나는 오늘의 얄개, 동생들은 내일의 얄개.’

1977년 개봉한 영화 ‘고교얄개’의 포스터 문구다. 개구쟁이 고교생들의 좌충우돌을 다룬 이 영화는 인기몰이를 하며 후속 시리즈의 모태가 됐다.

1970년대는 특히 하이틴 영화가 대세였다. 이는 ‘극장 춘추전국시대’를 맞아 관람객 확보로 경쟁이 치열했던 제주영화 시장에도 단비가 됐다. 이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칠성로를 중심으로 자리 잡은 극장 문 앞에서 서성이는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70㎜ 영화가 등장한 때도 1970년대이다. 필름이 작으면 작을수록 상영 시 더 확대 투사해야하므로 심도·정교함·색감·명암 대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좀 더 큰 스크린에서 화질 좋은 영화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 환경은 이렇게 점점 업그레이드 돼 가는 듯했다.

하지만 1973년 TV가 안방을 차지하면서 영화관을 찾는 관객은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비디오테이프 대여 업체도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안방극장에서 다양한 대작의 영화들을 볼 수 있게 됨에 따라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안방극장’을 더 선호하게 됐다.

1978년 10월에는 현대극장(제주극장 후신)이, 1979년 11월에는 아세아극장(중앙극장 후신)이 줄이어 문을 닫은 것만 봐도 관객수 감소로 인한 영업 손실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TV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는 도민들의 오락과 문화의 전부였다. 선남선녀가 데이트를 하는 경우에도 극장은 주요 약속 장소가 됐을 정도이니 말이다.

1980년 영화시장은 그동안 검열 대상이었던 시나리오가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외국영화의 수입도 개방되면서 큰 변화를 맞았다.

급기야 1982년 11월 제주시내의 극장들은 매주 토·일요일 심야극장을 개설, 문턱을 낮추는 노력을 펼쳤다. 관객들을 극장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묘책 아닌 묘책을 마련한 셈이다. 서울의 극장들과 동시상영 광고가 나오던 때도 이 시기다. 변사의 입담이 어우러지던 무성영화 시대, 고르지 않은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영화를 보던 시대, 35㎜ 필름 영화 상영시대는 과거 이야기가 됐다.

1950~1960년대도 이따금 있었지만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서울의 촬영 팀들이 ‘변방의 섬’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한 것도 요맘때부터다.

1990년대는 공공 문화공간에서 무료 영화 상영서비스가 제공됐다. 이렇게 극장은 일상 생활속으로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제주학생회관은 1991년부터 청소년들이 건전한 여가를 즐기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명화 감상실을 운영했다. 제주도문예회관도 꾸준하게 ‘좋은 영화 무료상영회’를 열었다.

새로운 형태의 극장도 깜짝 등장했다. 자동차극장이 그것이다. ‘별빛 아래서 영화를 즐겨 보세요’를 슬로건으로 내건 자동차극장은 1998년 11월 제주시 용두암 주차장에서 문을 열어 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야간 볼거리를 제공했다.

각자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야외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영화 감상은 당시 ‘문화혁명’과도 같았다. 사방이 꽉 막힌 극장의 사각 프레임 안에서만 봐야 하던 영화가 탁 트인 해변으로 ‘순간 이동’했으니 말이다.

한국영화인협회 제주도지부도 1999년 8월 10일부터 19일까지 화순해수욕장, 동화초등학교 운동장, 제주해변공연장에서 여름해변영화제를 열어 야외 영화 상영 시대를 이어갔다. 여고괴담, 상해임시정부와 백범 김구 선생, 이재수의 난, 연풍연가, 접속, 차이코프스키 등이 상영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단일관 체제의 극장계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대규모 복합상영관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만 상영하던 극장이 식당, 쇼핑 시설과 만나는 ‘멀티플렉스(multiplex)’가 된 것이다.

1970년 도내 한 마을 주민들이 가정집 마당에 모여 TV를 시청하고 있는 모습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극장은 그렇게 서서히 진화해 왔다. 우리들의 진화에 발맞춰서 말이다. 어떤 때는 나의 눈물이, 또 어떤 때는 나의 환희가 돼 주던 영화. 그래서 극장 안에는 제주를 살아가는 제주인들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

시간을 거슬러 문화의 중심지 원도심에 자리했던 다방·극장들은 현재 제주문화 형성의 기원이 된 것이다. 내가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내일 누군가 밟게 될 간절한 미래이며, 희망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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