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년 맞은 무하마드 알리의 죽음
1주년 맞은 무하마드 알리의 죽음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6.0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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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용 수필가·제주동서문학회장

[제주일보]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권투 계에 자기를 비유해 유명한 말을 남긴 복서 중에 복서 그이가 30년 동안 파킨슨 병을 앓다가 지난해 6월 4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1주년이 됐다. 세상 사람들이 알리를 좋아했던 이유가 있다. 최고의 복서이기도 했지만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싸운 것 때문일 것이다.

장례식은 지난 해 6월 10일 무하마드 알리가 마지막 가는 길을 일반 팬과 함께 하고 싶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1만 5000명이 모일 수 있는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KFC 염 센타에서 거행 됐었다. 이날 입장권을 무료로 배포했지만 수많은 팬들이 표를 얻기 위해 전 날부터 간이의자와 담요를 준비해 노숙을 하면서 밤을 새기도 했다고 전해졌었다. 표는 한 시간 만에 동이 나고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돈을 주고라도 표를 사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서면서 인터넷상에서 암표 거래까지 했다고 하니 알리의 생전에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된다.

무하마드 알리는 열두 살에 복싱을 시작해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라이트 해비 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인종 차별에 항거해 금메달을 호수에 던져버리면서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며 편견에 맞서 싸워 미국 주류사회에 큰 반항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프로에 전향해 세 차례에 걸쳐 해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고 통상 열아홉 차례에 성공하면서 1960년대부터 1970년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알리는 세 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유일한 복서이고 통산전적 61전 56승(37KO) 5패라는 기록을 세웠다.

1967년 이후 3년간의 공백을 가진 뒤 1970년 링에 복귀해서 조지 포먼과 대결 8회 때 KO로 물리치고 세계 챔피언에 다시 복귀하던 기억이 선하다.

무하마드 알리는 1942년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결혼을 세 번이나 하면서 풍미하게 살았지만 그 동안의 권투 생활을 하면서 얻어맞은 후유증으로 1984년부터 앓아 온 파킨슨병으로 결국 사망하게 이른 것이다.

알리는 사망하기 전 54세였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나와 오른 손을 떨면서 점화하는 모습을 봤다. 감동이었다. 또한 그는 남자농구 결승전 하프타임 때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으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그러니까 지난 1960년에 올림픽에서 인종차별에 항거해 던져버렸던 금메달을 36년 만에 받은 셈이다. 이후 무하마드 알리는 2003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시구자로 나섰고 2005년에는 미국 백악관에서 자유훈장을 받는 등 대중 앞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해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은 것이 대중들 앞에 보인 마지막 모습이다.

세계의 복서 알리, 세계의 인권주의자 알리, 뒤돌아보니 그의 죽음이 아쉽기만 하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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