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6.0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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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 겨울비는 술비”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비가 와도 들일을 해야하고, 여름엔 비 올 때 낮잠을 즐기고, 가을엔 비오면 떡을 쪄먹으며 쉬고, 겨울엔 술 마시며 논다“는 얘기다.

이런 말도 있다. 달갑잖은 손님이 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주인이 “이제 가라고 가랑비 온다”고 하자 갈 생각 없는 손님은 “더 있으라고 이슬비 온다”고 대답했다던가. 사실 가랑비는 가늘게 조금씩 내리는 비로 세우(細雨)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가는 비, 잔비를 말한다. 이슬비도 꽃잎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가벼운 비다. 또 이런 비도 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려 약으로 쓸 만큼 좋다는 약비, 때맞춰 알맞게 내리는 단비, 모종하기에 좋은 모종비, 모낼 때 오는 목비…. 비를 나타내는 이름이 이렇게 많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고 있다.

제주 서부지역 5월 강수량이 31.1㎜로 초기 가뭄 현상이다. 6월 들어서도 비소식이 없자 정말로 가뭄이 드는 게 아니냐고 걱정들이다. 기우제(祈雨祭)라도 지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약비나 단비가 아니라도 계속 올 것처럼 좍좍 내리다 그쳐버리는 웃비라도 한 번 쫘악 내렸으면 좋으련만.

TV드라마 ‘용의 눈물’은 태종(太宗) 이방원의 기우제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형과 동생들을 죽이고 임금이 된 태종 이방원. 나라에 큰 가뭄이 들자 자신이 저지른 업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종을 맞은 태종은 ‘죽어서라도 옥황상제께 청해 온누리에 비를 내리겠다’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햇볕이 쨍쨍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음력 5월 초열흘께에 내린다는 ‘태종우(太宗雨)’의 연원(淵源)이다.

오늘(6월 5일)은 음력 5월 초 열하루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올해엔 이 용의 눈물, 태종의 비도 내리지 않고 있다.

▲조선의 왕은 흉년을 몰아 오는 가뭄을 무엇보다 두려워 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통치자의 부덕 때문이라고 믿었다. 임금이 하늘의 뜻을 이어 받아 선정을 펴나가면 농사에 알맞게 비가 내리고, 그렇지 못하면 백성의 원망과 환탄을 불러일으켜 한재나 홍수가 일어나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왕은 동시에 ‘우사(rain maker)’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했다.

신하들이 왕의 실정을 터놓고 공격할 수 있었던 때가 가뭄이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였다는 것은 퍽 흥미있는 일이다. 가뭄이 계속되면 왕은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근신을 해야했다. 이러한 근신은 지방관도 마찬가지였다. 가무를 금했고 반찬의 수를 줄였다. 죄인처럼 반성하면서 백성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그리고 나서는 명산대천에서 기우제를 올리게 했다. 기암절벽과 탁 트인 바다를 즐길 수 있는 유원지인 부산 태종대도 신라 이후 동래 지역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었다.

제주에서는 산천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용의 기운이 있다해서 제주시 용연과 서귀포시 천제연 폭포 등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 풍습은 우리나라 뿐이 아니다. 게르만족은 처녀를 벗겨 물을 뿌리면 비가 내린다 믿었다. 중세 영국에서는 마을 교회의 종이나 큰 북을 울리기도 했다. 그 가운데 ‘인디언 기우제’는 꼭 비를 부르는 영험함으로 유명하다. 추장이 기우제를 지내면 꼭 비가 왔다. 그래서 미국 개척시대에 백인들이 큰 관심을 가졌다. 비결을 알아보니 간단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해가는 끈질김이었다.

옛날에는 가뭄을 ‘한발(旱魃)’이라고 불렀다. 발(魃)은 귀신인데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가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가뭄이라는 자연현상을 귀신의 조화로 받아들였던 전통사회의 가뭄 퇴치법은 그 귀신을 달래 내보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지금 21세기에 이런 귀신 이야길 더 할 수는 없고 수자원 관리의 중요성과 재해 예방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혹 이번 가뭄이 더 길어지면 용의 눈물을 보게 될까, 가무를 금하고 반찬을 줄이는 목민관을 보게 될까 조마조마하다.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라고. 그러면 혹시 몰라,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니까.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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