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운명
이중섭의 운명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5.3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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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

[제주일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이중섭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때였다. 딴에는 문학소녀였던 나는 보충수업과 자습이 이어지는 중에 교과서 대신 몰래 소설책 등을 펴놓고 읽곤했다. 그때 우연히 만난 책이 고은이 쓴 ‘이중섭평전’이었다. 이중섭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 불우한 화가의 삶에 단번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특히 그가 서귀포에 가족과 함께 지내는 부분에서는 격렬한 감동이 밀려왔다. 나는 그때 그의 가족과 머물렀던 눈물겹게 작은 방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것, 바로 그 집 옆으로 나있는 골목이 우리집으로 오고가는 지름길어어서 나에게도 익숙한 곳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 속의 게들이 내 유년의 장소인 자구리에서 그리 흔히 내눈에 띄던 것들이라는 것도 알 턱이 없었다. 나의 이중섭 사랑은 이미 그때 시작된 셈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중섭은 1951년 1월, 한겨울에 서귀포로 피난와 12월에 부산으로 떠났다. 일년도 안되는 짧은 ‘서귀포 시절’이 그 이후의 삶을 돌아볼 때 그에겐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였고 온화한 자연이 불안전한 피난민 예술가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을 것이다. 서귀포 시절 이후 그의 작품에는 아이들과 게가 함께 노는 모습이 끈질기게 등장한다. 회상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과거의 한 장면이 서귀포에서 완성된 것이다.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작품에 보이듯이 서귀포가 그에게 낙원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그 후에 그가 전전한 곳들은 암울한 피난지였다.

무엇보다도 서귀포를 떠난 그는 겨우 반년을 버틴 끝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했다. 혹시 더 오래 서귀포에 살았다면 가족들과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알콜에 의지하지도, 정신병에 시달리지도 않았을 게 아닐까. 끝내 그렇게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왜 더 오래 서귀포에 머물지 않았을까.

지난 여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시회에 갔다가 그 이유를 조금 눈치채게 되었다. 다름아닌 이중섭의 부인인 마사코여사가 일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구절에서다. 거기에는 서귀포에서는 먹을 것이 변변치 못해 힘들다는 말과 함께 남편이 그림작업이 여의치 않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배급으로 살아가야하는 피난민 신세다보니 일상의 허기는 알만하다. 당시 제주는 누구나 배를 곯던 시기였으니 피난민이야 오죽했으랴. 그런데 그림작업이 여의치않다는 것은?

자료에 의하면 이중섭은 서귀포에 머물 때도 가끔 부산을 오가면서 화단과의 교류를 이어갔다고 한다. 창작이라는 것이 예술가 혼자만의 고독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동료들과의 만남과 부딪힘이라는 자극이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그린 것을 보고싶어하는 사람과 알아주고 사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서귀포에서 이중섭은 물리적인 허기와 예술가로서의 허기, 이 두 가지에 시달렸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특히 그림 이외의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화가로서는 예술가로서의 허기가 곧 가족의 물리적인 허기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구리 해안을 산책하고 게를 잡고 비록 비좁은 방이었지만 온가족이 함께 하는 쪽을 택했더라면? 가난해도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계속 필부로서의 삶을 이어갔더라면? 뒤늦게 낙원이요 환상이라고 깨달은 서귀포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이 우문의 대답은 뻔하다. 우리는 이중섭이라는 사내는 설령 알아도 이중섭이라는 위대한 화가는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예술혼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서귀포를 보고 있지 못할 것이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행복이 유달리 강조되는 이 시대에도 ‘안빈낙도’를 스쳐지나게 하는, 떨치고 나아가게 하고야마는 힘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운명, 제주도 말로 ‘전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며 숭고함이 아닐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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