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민(與民)으로 돌아가도 되는 이유
여민(與民)으로 돌아가도 되는 이유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5.22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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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제주일보] 초면인 서양 정치철학 전공자가 대뜸 “동양의 민본(民本) 정치를 민주주의의 맹아(萌芽)로 볼 수도 있겠지요?”라고 물었다. 동양철학, 그것도 유학이 전공이라고 하면 으레 듣는 인사치레다.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개는 이쪽에서도 “아, 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정도로 감사표시를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왠지 배려 가득한 상대의 인사치레가 고깝게 들렸다. 그래서 “민본(民本)은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는 뜻이니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실제로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민주(民主)’에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이 선언되어 있지만 민본에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백성이 정작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으니까요”라고 맞받았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상대는 퍽 당혹스러워했다. ‘참 못할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물론 봉건사회의 정치이념을 민주주의의 싹으로 봐 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마는”이라고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애당초 “아, 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고 자책하면서 말이다. 마음에 쌓아 둔 게 많으면 호의와 배려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네 전통에서도 미숙하지만 이상적인 것이 있었네요”로 들린 거다. ‘동양을 당신네라고 부르는 당신은 동양인이 아닌가?’ 결국 이 과한 반감은 ‘민주주의’를 ‘민본’보다 위에 두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식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깝게 들은 건 이쪽 잘못이지만 말이다.

민본이라는 말은 ‘서경(書經)’의 오자지가(五子之歌)에서 비롯되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 하나라 3대 군주인 태강(太康)이 정사를 팽개치고 저 멀리 낙수(洛水) 남쪽까지 놀러가서 10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우 다섯이 어머니를 모시고 낙수(洛水) 물가에서 기다릴 적에 부른 노래다. 이 노래는 할아버지인 우(禹) 임금의 가르침을 빌려 정사를 돌보지 않는 형에 대한 원망을 담고 있다. 민본(民本) 앞에는 ‘백성은 가까이 할지언정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民可近 不可下).”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이에게 백성은 친해두어야 하는 대상이다. 왜냐고? 그들이 따르지 않으면 나라를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위민(爲民)과 여민(與民)도 마찬가지다. 백성을 제대로 위한다면 백성을 사랑하고 (애민·愛民), 더 나아가서는 섬길 수도(시민·侍民)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이 있었던 옛날은 물론 민주의 시대인 지금도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맹자’ 양혜왕장구 상편에서는 양혜왕에게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 ‘여민해락(與民偕樂)’을, 하편에서는 제선왕에게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는 것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왕도정치의 핵심이라고 조언했다. 맹자는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이 제후들의 근심을 털어준다. 백성과 함께 즐기기만 한다면 무엇을 누리던 훌륭한 정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위민이면 어떻고 여민이면 어떠냐?’, ‘위민도 훌륭한데 괜히 이목을 끌려 하는 것이 아니냐?’, ‘국민을 위한 마음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등 청와대 비서동 건물이 새로 들어선 2004년 12월에 붙인 이름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고 말이 많다. 그런 논리라면 2008년 세종의 위민정치를 본받겠다는 명분을 들어 굳이 위민관으로 바꿀 필요도 없었다. ‘논어’ 자장 편에서는 ‘군자는 어진 이를 존경하고 뭇 사람을 포용하며, 잘하는 이를 좋게 여기되 잘못하는 이를 불쌍하게 여긴다’고 했다. 여민도 위민도 다 ‘민본’ 시대의 유물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희가 주체가 되고 국민이 객체가 되는 개념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는 말이 착하다. 이 한 마디가 ‘민주’의 시대인 지금에도 ‘여민관’을 곁에 두고 마음에 새겨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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