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쓴 편지엔 鄕愁(향수)가 있다
손으로 쓴 편지엔 鄕愁(향수)가 있다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5.2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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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하얀 습자지에 잉크펜으로 쓴 편지였다.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중략) 부모님이 떠나신 고향(대정)은 타향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서울’이 제2고향도 아니고 보니 타관(他關)생활이 그렇습니다…”

청와대 경제2수석실 중화학공업기획단에 있다가 서울시교육청으로 옮겨 제3대 교육감 공보담당관, 과장, 국장을 거쳐 퇴직한 서울에 사는 선배. 그가 보내온 편지는 고향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던가. 고향에 갈 기회가 되면 꼭 만나자는 편지 말미엔 짙은 향수(鄕愁)가 달렸다.

사람은 고향에 대한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제든 그것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서울에서 직장을 가졌던 도민들 가운데는 퇴직하고도 이런 저런 이유로 상당수가 서울에 남는다. 동향끼리 삼삼오오 모이기도 하고 1년에 한두 번 체육대회나 산행을 하기도 하지만 향수를 달래기는 턱도 없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1915~1978)은 젊은 날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제주도로 이주했다.(제주일보 2월 1일자 기획) 그는 노년에 제주사람들을 만나면 제주를 제2의 고향이라고 했다. 추억이 봄비나 가을 바람에 묻어나곤 했을까.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언제나 경주라고 대답하면서도 제주도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고향은 기억속에 풍경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먼저 어릴적 기억들을 새롭게 해주는 아버지·어머니,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옛 동무, 첫 사랑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선연해야 한다. 그 다음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제주도라면 우선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해녀들의 숨비소리, 또 검은 소의 워낭소리, 보리밭 종다리 나는 소리, 한라산 기슭의 장끼 우는 소리 등…. 특히 정겨운 음색이 빠져선 안 된다. 제주도 사투리 말이다. 타향에서처럼 표준어 통역이 필요없는 그냥 그대로 술술 나오는 토박이 말이 남아 있어야 고향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한 가지 더한다면 고향에는 흑백사진 같은 시각적 기억이 있다. 수백년 묵은 마을의 팽나무, 비석거리, 용천수, 동네 사이로 난 돌담길, 동백나무, 목구실 나무 같은 것들이다. 흑백사진에는 이런 것도 있다.

“외진 우리 집은 전기가 늦게 들어와 한동안 호야를 켜야했다. 밤이 깊도록 호야불 아래서 오빠는 무언가를 만들고 엄마는 못다한 일을 하셨다. 나도 코를 훌쩍대며 숙제를 했을까….”(서울제주도민회신문 2017.4.25, 수필. 오설자, 안덕출신)

있어야 할 게 또 있다. 미각이다. 맛은 대개 어머니의 손끝에서 혀끝으로 전해진다는데 나에겐 할머니의 손끝이다.

자연산 먹거리 외에도 밥, 떡, 간장, 된장. 그런 것 말고도 여름날 재피 넣은 자리물회, 물외냉국, 반치, 자리젓, 식혜, 쉰다리 맛도 빠질 수 없다. 고향(故鄕)의 ‘시골 향(鄕)’자는 본디 밥을 차린 음식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나타내는 상형 문자다. 이 문자가 시골을 뜻하게 된 것은 마주 보고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 확장돼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게 됐기 때문이다.

▲고향은 언제나 과거형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과거를 감성적으로 동경하는 향수, 즉 노스탤지어(nostalgia)는 부정적 감정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향수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미국의 사회학자 프레드 데이비스가 펴낸 ‘옛날을 동경하며(Yearning for Yesterday)‘에서 사람들이 향수를 ‘따뜻한 고향’같은 긍정적인 단어와 연결시킨다는 주장 이후다.

그 후 사회심리학자 콘스탄틴 세디키디스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마인드(Scientific American Mind)’ 2010년 7·8월호에서 “마음을 어두운 생각으로부터 지켜주는 갑옷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심리적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보호해준다”고 정리했다.

요컨대 고향과 추억은 기분을 호전시키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증진시키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고향의 그 사람, 그 빛깔, 그 소리, 그 맛은 다 ‘그리움’이다. 그리고 하나 더.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쓰지 않고 손으로 쓴 편지에도 어릴적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향수가 있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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