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에서 얻는 정의'를 끼적이다
'다름에서 얻는 정의'를 끼적이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5.2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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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구. 미국 앨라배마대학교 커뮤니케이션정보대 부교수

[제주일보] 상반기를 마무리하는 기말시험 끄트머리에 ‘정의’(justice)에 대해 물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미국 학생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궁금하던 차였다.

서로 다른 형식의 답변을 모아 생각의 얼개를 추려보았다.

우선적으로 옳고 그른 행동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이라 보는 견해가 다수였다. 몇몇은 인종·종교·가치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공정하고 동등한 기회를 주고 대우하는 것이라 여겼다.

어떤 학생은 행복 추구와 도덕성으로 정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서른 명 남짓의 학생들이 보여준 분별력은 ‘죄와 벌’이라는 단순한 시각을 넘긴다. 되레 여태껏 정의를 논하고 정리한 철학적 통찰의 궤도에 접근하고 있다.

마이클 샐던(Michael Selden)의 ‘정의’(Justice, 2009)는 세 가지 흐름을 얘기한다. 그 갈래 하나는 개인이 행복을 최대한 누릴 수 있는 정의를 중시한다.

또 다른 줄기는 선택과 기회의 자유를 정의와 엮는다.

세 번째 기조는 공동체 이익을 위한 타당한 논리와 도덕적 가치를 키우는 정의를 역설한다.

맥은 짚었지만 당면한 정치, 사회적 문제를 정의 하나로 대입시켜 헤아리긴 쉽지 않다.

정의가 주관적이어서다. 상황에 따른 판단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1+1=2’처럼 시공을 넘나들며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바뀌고, 정의는 대세를 따른다. 사람·국가·시대·문화에 따라 다른 정의를 살고 있다. 제각각이다. 그래서 정의의 현실 적응은 어렵다. 개인의 총기소지는 헌법에 보장된 미국사회의 정의다.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는 건 당연한 권리이며 때론 지역과 국가 공동체를 방어해야 하는 시민의 의무를 지녀야 한다는 대의적 명분이다. 1791년에 법으로 명문화되고 큰 틀은 20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헌법적 정의는 끊이지 않은 총기 범죄와 사고 때마다 도전을 받는다.

가깝게는 1999년 콜럼바인 고등학교, 2007년 버지니아 공대, 2012년 콜로라도 극장에서 발생한 총기난사로 인해 많은 인명을 앗아간 살벌하고 아픈 기억이 있다.

공권력의 총기 사용 판단이 인종차별 문제로 불거지기도 한다.

바람 불면 날릴까 하지만 총기규제 논란은 이내 잠잠해 진다. 수정헌법 2조가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아칸소 주에서는 공공장소에도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빠르면 올 9월부터 발효된다. 공공장소에는 대학캠퍼스와 주정부 건물 등이 포함돼 있다. 아칸소 주와 가까운 앨라배마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강의실의 나를 떠올려봐야 했다. 출석 확인이 총기 숫자를 세는 듯 두려울 것 같다.

강의가 주는 행복을 앗아가고 표현과 선택의 자유는 잠재적 불안에 숨쉬기 버거울 게 자명하다.

간담 서늘한 망상이 현실로 다가와 초조하다. 그게 정의는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정의의 대한 사사로운 졸견과 오해를 의식한 듯 마이클 샐던은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넘어선 공동체적 정의를 갈구한다. 행복한 삶의 의미를 같이 고민하고 얘기한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 지향이 어긋나도 마음을 열고 듣고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모아진다. 간판으로 흔한 ‘정의사회 구현’과는 질감이 다르다.

탄핵과 대선을 거치고 사드 배치와 반대로 대립하면서 우러난 감정과 갈등에 다시 묻는다.

너와 나 달라도 너그럽고 다독일 수 있는지. 다름에 우러를 수 있는지. 이러한 담론의 부재로는 ‘내로남불’의 정의만 우거진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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