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류 열매 약재, 동아시아 삼국서 의약적 존재감 컸다
감귤류 열매 약재, 동아시아 삼국서 의약적 존재감 컸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5.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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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16>제주 과원의 설치와 그 성격(6)
명나라에 파견한 조선 사신 일행의 약재류 수입 관련 기록(세조실록 권36, 세조 11년 8월 경인조).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 감귤류의 열매는 민폐가 야기될 정도로 상납물량이 많았다. 그 상납물량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몫은 약재를 가공하는데 들어갔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가 국내에서 약재로 쓸 수 있는 감귤류 열매의 산출지로서는 유일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조선정부가 감귤류 열매의 약재를 조달받는데 국내에서는 제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나, 나라밖으로는 여러 곳이 있었다.

동아시아 삼국, 곧 조선과 명 및 일본은 14세기 후반 원·명교체기를 거치고 명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수립되자,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 이전 몽골 중심의 세계 질서가 작동하던 시기에는 고려가 원과의 교류는 왕성했으나, 일본과의 관계는 단절되다시피 했다. 이후 조선이 1392년 건국되고, 1404년(태종 4)에 이르러서는 일본과 국교를 맺었다.

그래서 조선은 명과 일본에 대해 사대교린의 외교활동을 펼쳐 나가게 됐다. 사대교린은 세력이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나라와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 방침이다. 즉, 조선이 명과는 사대관계,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맺으면서 무역 등도 도모했던 것이다.

사대교린의 관계 가운데 조선이 양국과 행한 교역을 보면, 1465년(세조 11) 조선의 사신 일행이 명나라를 가고 오면서 너무나 많은 양의 약재를 구매하는데 따른 폐단이 지적된 적도 있었다. 그 약재의 많기가 배 30~40척(隻)에 선적해야 할 물량이고, 육로로 운송하던 말이 거꾸러져 죽을 정도라 한다.

이렇게 많은 약재물량이 조선 국내로 들어오게 된 것은 사신 일행의 개인적 의도와 용도에서 비롯함이 아니었음도 드러난다. 곧, 사신 일행은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혜민국(惠民局) 등과 같은 각각의 공적 보건의료기구로부터 약값을 받은 뒤, 그 돈으로 중국산 약재를 구매·반입코자 했던 것이다. 이는 이들 약재가 국가의 보건의료에 쓰일 공적 목적에서 수입됐음도 뜻한다. 이들 약재류에 대해서는 감초·후박(厚朴)·진피(陳皮)·건강(乾薑, 말린 생강)·마황(麻黃, 마황의 부드러운 줄기)이 대표적으로 거론됐다. 이들 중에는 진피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 간에 벌어진 교역에도 조선 초창기부터 진피를 주고받았음이 자주 확인된다. 이들 양국은 진피 외에 청피(靑皮)도 자주 주고받았다. 이들 경우는 거의가 일본지역 가운데 감귤류 나무가 자라는 곳에서 온 정치세력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 불경 등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진피 혹은 청피도 바쳤던 것이다. 조선도 사례의 뜻으로 각종의 포(布) 등을 주곤 했다. 이때 일본지역으로는 쓰시마(對馬島)·큐수(九州)·나가사키현(長崎縣) 연안 소재의 이키시마(壹岐島) 등이 확인된다.

진피와 청피가 조선에서는 19세기 초반 이전 시기부터 상당한 소비가 이뤄졌음도 조선과 일본 간의 교역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왜관(倭館)은 일본 측의 용어로 화관(和館)이라 일컫는 곳으로 조선시대 때 일본인이 들어와 통상을 행하던 거점 시설이었다.

왜관은 개항장의 설치와 폐쇄에 따라 소재지와 관련해 우여곡절을 겪다가 최종적으로 현재의 부산항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일본국의 쓰시마도주(對馬島主)의 주재원이 상주해 외교 기관으로의 역할도 맡았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1809년(순조 9) 쓰시마도주 타이라 요사카츠(平義功)와 왜관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약정을 맺게 됐던 것이다.

이 약정 가운데 하나가 “화관의 진피·청피·황련(黃連, 황련의 뿌리)의 경우는 일용(日用)하는 물건이니, 다시는 이렇게 도고(都賈)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도고는 상품을 매점매석해 가격 상승과 매매 조작을 노리던 상행위를 말한다.

일본 상인이 왜관을 통해 진피·청피·황련을 대상으로 도고에 나섰던 배경과 함께, 조선정부가 일본 상인의 도고를 금지케 한 연유와 관련해서는 진피·청피·황련이 모두 소비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품목임이 거론됐다. 곧, 조선정부는 일본 상인이 대자본과 왜관을 통해 국내에서 소비가 활발한 진피·청피·황련을 매점매석하고, 폭리를 취하려는 상행위에 제동을 걸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 품목은 향약(鄕藥)이고, 그 가운데 진피·청피는 모두 제주 산출의 감귤류 열매가 약재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 하겠다.

감귤류 열매의 약재, 그 중 진피와 청피의 경우는 조선정부가 초창기부터 명과 일본에 대해 사대교린의 관계를 맺은 가운데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져 나아간 품목이었다. 이는 삼국에서 감귤 열매의 약재가 널리 쓰이고 있는 한편, 그 약리적 효능의 명성도 높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야한다. 또한 제주 감귤류 열매의 약재가 19세기 초반 이전 시기부터는 국민의 보건의료와 관련해 대중적 소비가 이뤄지는 작금의 위상을 지니게 됐다고 하겠다. 여기에도 진피와 청피가 동아시아 삼국에서 차지한 의약적 존재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깨끗한 물을 사용한 좋은 진피 만드는 법 - 솔과 물로 이물질 닦은 후 건조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진피(陳皮)’ 제조, 곧 귤껍질을 묵혀서 약재로 만들려면, 일단 귤이 노랗게 잘 익어야 한다. 이 가운데 품질이 안 좋은 것은 적과(摘果)해 버리고, 좋은 것만을 따고는 정선가공(淨選加工)이 필요하다.

정선은 약물로 만드는 초보가공과정으로, 귤열매를 솔(刷)과 깨끗한 물(淸水)을 사용해 잘 털고 헹궈서, 껍질표면에 부착된 흙, 모래, 벌레 등의 이물질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조시킨다. 이후 껍질표면이 어느 정도 마르면 껍질을 까고 알맹이는 버린다. 다음은 껍질 안쪽에 붙어 있는 섬유질을 없앤다. 이를 위한 손쉬운 방안으로 9세기 중기 쥬똰(咎段)은 ‘식의심경’에서 “귤피를 끓인 물에 담아 과육과 섬유질을 제거한다(橘皮…湯浸去瓤)”고 했다. 이어 다시 잘 씻어 말려 약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과육과 섬유질을 제거하는데 대해 17세기 후반 왕앙(王昻)은 ‘본초비요(本草備要)’에서 “포만감을 없애기 위함(去穰者 免脹)”이라 했다.

물의 이용은 진피를 약재로 썰기(切)전에 처리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11세기 후반 쑤송(蘇頌)은 ‘본초도경’에 “알맹이를 제거한 귤피를 땡볕에 말리고 오래 묵힌다(去肉曝乾黃橘 以陳久)”고 했다. 이들 진피가 물을 뿌리는 림법(淋法), 물에 담그는 포법(泡法), 물이 껍질표면에 차츰 스며들게 하는 침윤법(浸潤法)을 거친 뒤, 썰고서 약재로 사용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중약대사전’에는 “솔을 가지고 흙을 털어내고 이물질을 없애고 깨끗한 물을 뿌려 수분이 귤피에 잘 스며들면 면발처럼 썰거나 작게 조각내 그늘에서 말린다(刷去泥土 揀淨雜質 噴淋淸水 悶潤後切絲或切片 晾乾)”라고 돼 있다.

최근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감귤연구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감귤 선과과정에서 솔과 물을 사용해 세척을 거친 감귤의 경우가 기존 물 세척 및 피막제(왁스) 사용보다 신선도가 높았다고 한다. 감귤향에 대한 방향성 성분 분석 결과에서도 감귤향의 주성분인 리모넨(di-limonene)이 솔을 사용한 물 세척 감귤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신선도가 떨어지는 감귤에서 나는 나쁜 냄새의 정도를 나타내는 푸르푸랄(furfural), 벤젠(benzene),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 성분이 물 세척과 피막제 사용의 감귤에서 가장 많게 잔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요즘, 감귤 세척에는 물과 오존수 또는 소금물 등을 같이 사용하곤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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