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지 못한 역사'
'이름 짓지 못한 역사'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5.1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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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작가 / 칼럼니스트

[제주일보]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새기지 못한 비석.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도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의 ‘프롤로그’ 공간에는 3m 크기의 하얀 비석 ‘백비’가 누워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도 보인다.

제주4․3이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후에도 ‘잠들지 않는 남도’는 식전행사에서조차 불려지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백비에 글자를 새겨 넣고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제주4․3이 제대로 평가를 받는 것은 통일이 된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시작이 분단에서 비롯됐고 그 과정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항거했기 때문이다.

일흔 성상을 바라보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제주4·3은 ‘잠들 수 없는 역사’, ‘완성되지 않은 역사’가 되고 말았다. 백비가 그냥 누워 있음은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 반쪽 짜리 역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4․3의 달력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기득권 세력들은 촛불을 종북(從北)이라고 왜곡했듯이 제주4․3 역시 ‘빨갱이 짓’이라는 취급을 받아왔다. 제주4․3에 대한 정명을 찾고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국가와 미국의 책임을 당당히 물어야 한다.

온전치 못한 민족의 해방은 1948년 제주4․3의 불씨가 됐다. ‘흔들리는 섬’ 제주는 ‘해방-자치-미군정-3·1절 발포사건-탄압-학살’의 역사적 상황으로 급박히 전개됐다. 해방은 남북분단으로 이어졌고 결국 예견된 전쟁을 불러 왔다. 지난 70년간 38선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군부정권이 ‘공산무장폭동·반란’으로 억압했던 제주4·3의 이름은 1960년 4·19혁명을 거치면서 ‘사건(incident)’으로 환원됐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화된 진상규명운동으로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됐지만 제주4·3은 여전히 ‘사건’에 머무르고 있다.

‘봉기’도 ‘항쟁’도 ‘폭동’도 ‘사태’도 ‘사건’도 아닌 채로 그냥 ‘제주4․3’이라 불린 그 비극. 그렇게 그 어떤 이름도 가지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원인규명 부족이나 모호함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날, 이 시간까지 그 가해자와 그 후계자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도권을 쥔 채 또 다른 관점에 제주4․3을 재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4․3의 완전한 해결은 진상규명-책임자 처벌-배·보상-명예회복의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첫 단추인 진상규명부터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올바른 진상규명은 제주4․3의 성격규정과 정명을 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5․18민주화 운동’, ‘4․19혁명’이라고 하지만 제주4․3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제주4․3’ 또는 ‘제주4․3사건’이라고 부를 뿐이다. 제일 먼저 당시 가해자와 미국의 책임을 밝히는 일이다. 2003년 故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국가권력’은 ‘미군정’이다. 제주4․3 당시 미군정의 역할은 무엇이었고, 책임은 무엇인지 철저히 밝히는 일 또한 중요하다.

‘역사에 정의를! 4·3에 정명을!’ 제주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큰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했다. 이제 새로운 정부도 들어선다. 제주4․3은 도민만의 비극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고, 반드시 계승하고, 앞으로 되풀이되지 않도록 모든 국민들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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