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쉰다리, 추억의 두 그림자
막걸리와 쉰다리, 추억의 두 그림자
  • 제주일보
  • 승인 2017.05.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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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 전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제주일보] #추억1. 아마 초등학교 시절인가 싶다. 시골이라 동네 어른들이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앉아 막걸리를 마셨던 광경을 자주 봤다. 그럴 때 그 앞을 지나가게 되면 빈 주전자를 주면서 점빵에 가서 술을 사오라고 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약간의 용돈이 생기기에 얼른 “예!” 하고 달려가 주전자에 술을 채워 왔다. 그런데 하루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주전자의 코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셨다. 맛이 괜찮았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다. 묘한 맛이었다. 한 모금 더 마셨다. 좀 취기가 올랐나? 길거리에 주저 앉았다. 지나가던 똥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너도 한 잔 마실래? 손바닥에 막걸리를 따라주고 마시도록 했다. 낼름 낼름 잘도 핥아 먹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개나 소나, 이 맛에 마시는구나!” 그날 오후 동산에 드러누워 하늘을 봤다. 태양은 저물어 가는데 하늘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아 버렸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인가? 바람이 몸을 감쌌다. 시원했다. 정녕 나의 벗인가. 그렇게 잠을 잤다.

#추억2.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어머니가 집에서 막걸리를 빚었다. 먹다 남은 보리밥이 상하게 되면 이에 누룩을 섞어 만들었다. 당시는 집이 가난했기에 먹을 것이 흔하지 않아 상한 보리밥도 버리지 않고 막걸리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름은 ‘쉰다리’라고 했다. 밭농사를 할 때에도 이 ‘쉰다리’ 한 주전자를 들고 갔다. 점심때가 되면 아버지는 ‘쉰다리’로 허기를 보충했다. 물론 나도 한 모금씩 마셨다. 비록 쉰 음식일지라도 버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만들어서 부족한 식품의 낭비를 줄였다. 맛이 달콤하고 소화가 잘 되며 씹을 필요가 없어서 노인들이 즐겨 먹었다. 누룩을 넣어 발효시켰기 때문에 끓이지 않은 생순달이는 많이 먹으면 살짝 술기운이 느껴지며 새콤한 맛이 식욕을 돋구기도 한다. 유산균이 살아 있어서 소화에 좋고 오래 보관하면 계속 발효되어 식초가 되기도 한다. 이쯤되면 쉰다리는 제주인이 만든 지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제주에는 쉰다리를 만들어 내는 곳이 있다. 요구르트라고 하기도 하고 막걸리라고 하면서 추억을 음미하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즐겨 찾는 이들이 있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추억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노젓는 것이 아니겠는가. 직장인들은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동료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힘들고 괴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쉰다리도 그 축에 끼어 넣어보자. 제주 어머니가 만든 쉰다리, 막걸리 사촌! 이웃 사촌이 좋다 하지 않았던가. 막걸리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국민술이다. 좋은 봄날이다. 비가 올테고 지천에서 꽃이 피고 지고 할 것이다. 그런 자연을 바라보며 자신만이 간직한 막걸리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면서 친구나 선후배들과 함께 정담을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고려시대 때 ‘국선생전’(麴先生傳)을 쓴 이규보는 쉰다리와 비슷한 막걸리를 마시며 봄을 즐겼다고 한다. 아울러 ‘백주(白酒)라는 시를 썼다. 白酒는 하얀 술이라는 뜻으로 막걸리의 다른 이름이다.

‘내 옛날 벼슬없이 떠돌던 때는/매일 마시는 것이 오직 막걸리 뿐이어서/어쩌다 맑은 술을 만나면/쉽게 취하지 않을 수 없었지/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을 적엔/막걸리 마실려도 있을 ​리 없더니/이제 늙어 물러난 몸 되니/녹봉이 줄어들어 쌀독이 자주 비네/좋은 술은 없다가 있다가 하니/막걸리를 마실 일이 또한 많아져~’

벼슬에 나가기 전 막걸리를 마시다가 나이 늙으니 다시 막걸리를 자주 마셨다는 내용이다.

막걸리는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친숙한 벗이다. 봄날의 막걸리는 또다른 추억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정철의 ‘장진주사’에 나오는 가사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같은 낭만도 좋겠다. 어느새 봄날은 가버리니까.

제주일보 기자  isuna@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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