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5.07 17: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제주일보 편집국장 고영기 선생은 어린 후배 기자들과 술 한잔을 하면, 한 곡 뽑던 18번이 ‘봄날은 간다’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1절도 좋지만 2절이 괜찮았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정말 몰랐었다. 돌이켜보면 분명 화창한 봄날이었으나 정작 그땐 고단하고 불안해 인생의 봄날인 줄 몰랐던 30대 초반 후배들 앞에서 왜 그 노래를 자꾸만 불렀는지. 아무튼 그 노래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아주 훗날 50대에 들어서였다. 노래는 잘 부르지 못하지만 애절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서러운 멜로디를 들을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찡해진다.

▲어느 해였던가. 계간 ‘시인세계’ 설문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이 ‘봄날은 간다’가 뽑혔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들이라 온 산하에 새 순과 꽃이 합창하듯 피어나는 봄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읽었던 것일까. 며칠 전 국문학을 전공한 지인이 노래방을 가자해서 따라갔더니 역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라는 구절을 부를 땐 아무렇지 않다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울던’하는 대목에선 목이 메이고 눈가엔 이슬이 맺히는 것 같았다. 30여 년 공직의 삶이 덧없다고 느꼈음인가. 서글픈 가락이 구성지더니 파르르 떨린다.

‘산다는 건 하나씩 없어지는 일을 겪는 것’이란 말도 있거니와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랑을 얻기도 하고 사랑을 잃기도 한다.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시절, 승승장구하다 한순간 점점 작아지는 상자에 갇힌 것처럼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어쩌랴. 이제는 봄을 맞이하는 설렘과 기쁨을 표현하는 글보다 봄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노래하는 글에 더욱 마음이 와닿는 것을.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도 짧은 것, 가장 빠르면서도 느린 것,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잃어버리면 가장 안타까워 하는 것, 아무리 좋은 것도 사라지게 하는 것….’ 그게 뭐냐고 했다. 정답은 시간이다. 요약하면 시간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으면서도 상대적이란 거다. 그 시간 중에 유독 짧게 느껴지는 게 봄이다. ‘봄날은 간다’는 노래가 이토록 가슴을 파고 드는 것은 봄날이 짧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봄을 붙잡으려 하나 머무르지 않으니, 봄이 가고 나면 사람도 쓸쓸해지네(留春 春不住, 春歸 人寂寞)”라고 한 백거이의 심정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언제부턴가 봄이 허망할 정도로 부쩍 짧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 마치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인생은 덧없고 봄이 결코 길지 않음을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제주도의 경우 3월 평균 기온이 섭씨 8.9도, 4월은 13.6도, 5월이 17.5도라고 한다. 5월 하순부터는 더위가 시작하는 걸 감안하면 정말 봄다운 봄은 4월 초에서 5월 초 사이의 한 달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필시 소동파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했던 봄의 끝자락에 와 있는 셈이다.

▲활짝 피었던 꽃들이 연휴와 주말에 분 바람으로 꽤 많이 떨어졌다. 꽃이 지면서 잎의 녹색도 짙어졌다. 봄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릇을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듯이 꽃이 져야 잎이 나고 새 생명이 솟아나리라. 이 얄궂은 봄을 감옥에서 보내는 사람들은 또 무슨 심정일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최씨를 비롯해 박근혜 전 대통령,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 조윤선 문체부장관, 정호성 청와대 비서관,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종 문체부 차관 그리고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 등….

덧없이 가는 게 어찌 봄날 뿐일까. 때가 되면 권력도 진다. 낼 모레면 새로운 청와대의 주인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정말 잊지말아야 할 일이 있다. 권력을 잡기 전이든, 잡은 후든,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 일이다. 언젠가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된다. 누구에게나 봄날은 간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