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귤, 조선 때 ‘별공·진상·공물’로 20여 차례 상납 ‘민폐’
제주 감귤, 조선 때 ‘별공·진상·공물’로 20여 차례 상납 ‘민폐’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5.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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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15>제주 과원의 설치와 그 성격(5)
(좌측) 감귤봉진(탐라순력도 수록 화폭), (우측) 11세기 후반 ‘증류본초’에 기술된 ‘뇌공포자론’에 나온 귤피의 수치 관련 최초의 기록.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 감귤은 조선정부의 다양한 국가적 용도 가운데 약재로서의 쓰임새에 가장 대규모의 물량이 들어갔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제주에서 상납했던 감귤류의 내역을 분석한 사실도 방증자료로 삼을 수 있다.

우선, 제주 감귤의 상납 관련 일반적 실태를 알아보자.

제주 감귤은 3가지 세목으로 상납이 이뤄졌다. 이들 세목 가운데 하나는 절기에 따라 산출되는 지방특산물로 관부의 소요에 따라 수시로 부과되던 별공(別貢), 또 다른 하나는 각 지방의 토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진상, 나머지 하나는 국가기관 소요의 물품을 각 지방에 부과하던 공물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제주의 감귤류 열매와 아울러, 이를 약재로 가공한 진피, 청피, 지각, 지실, 혹은 귤의 씨, 귤의 잎도 24운(運), 곧 24차례에 걸쳐 중앙정부로 진상·이송됐던 것이다.

이들 횟수와 그 물량의 이송은 제주 사람에게 벅찬 일이었거니와, 민폐도 컸다. 그 실태가 제주 사람이 1608년(광해군 즉위년) 글을 올려 하소연할 정도였다.

이에 광해군이 우선 24회에서 20회로 감축토록 했다. 이는 제주목사 이원진이 1653년(효종 4) 편찬한 ‘탐라지(耽羅志)’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는 각종 감귤류 열매와 그에 따라 정해진 물량이 20차례에 걸쳐 진상·이송됐다는 사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탐라지’ 등의 사서를 보자면, 시기적으로는 9월에 가장 일찍 익는 유자와 금귤, 10월 그믐의 유감과 동정귤 등의 순서로 이송되고, 12월에는 진피, 청피, 귤의 씨, 귤의 잎, 지각, 지실이란 약재류가 상납됐다. 청귤은 겨울에는 맛이 시어 달지 않다고 해 2월에 보내졌다. 이 가운데 게재된 <표>의 ‘酸物(산물)’ 해당란에 보이는 각종 감귤류 열매가 9월부터 시작해 매 10일 간격으로 다음 해 2월에 이르기까지 1년 20차례 진상·이송됐던 것이다.

비록, 제주 감귤류 열매의 진상·이송이 광해군에 의해 4차례 감소한 20회로 줄어들게 됐으나, 이는 잠정적 조치였다. 또한 준수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일례로, 제주목사 이형상이 1702년(숙종 28) 제작한 ‘탐라순력도’ 수록 ‘감귤봉진(柑橘封進)’을 보면, ‘종묘제사에 쓰이는 제물의 2차 진상으로 21차례의 이송(運)’이 이뤄졌음도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진상 감귤류 열매의 품목과 각각의 수량도 나온다. 이밖에 치자나무 열매 112근, 진피 48근, 청피 30근도 함께 진상품목으로 나열돼 있다. 제주 감귤류 열매의 진상과 같은 경우는 열매만의 상납에 국한된듯이 보이나, 실상은 감귤류 열매의 약재화 과정을 거친 품목도 함께 부과됐음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제주 감귤류 열매의 진상ㆍ이송이 20차례를 넘어서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고 하겠다.

다음은 제주 감귤류 열매 관련 상납액을 들여다보자. 이는 각종 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이원진 편찬의 ‘탐라지’에 수록된 내용이 세세한 편이다. 이를 기준으로, 상납내역을 작성·게시하면 <표>와 같다.

<표>의 월령(月令)은 매달마다 진상하는 물품으로 별공에 해당하고, 세초(歲抄)는 해마다 12월에 상납하는 진헌품목을 말한다. 이들이 ‘탐라지’에는 산물과 함께 진상이란 세목으로 올라갔거니와, 그 각각의 내역은 제주목에서 제주도내 삼읍, 곧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 나눠 정해 진상하는 것의 합산이다. 이외에 제주목 및 정의현과 대정현은 그 각각의 군현 단위로 부과된 감귤류 열매와 그 약재도 공물로서 상납했다.

<표>를 보면, 상납품목의 감귤류 열매와 그 약재의 단위가 각각 열매 하나하나를 헤아리는 개수와 무게를 수치로 표하는 근수였다. 한편 현 진피가공자의 전언에 의하면, 감귤 알맹이에서 껍질의 무게가 약 4분의 1이고, 그 껍질을 챙겨 약재로 가공코자 말리면 그 무게가 5분의 1 정도로 감해진다고 한다. 또한 제주 전통재래귤의 경우, 과실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당유자는 250g 내외, 나머지는 25~80g 정도로 본다. 그런 만큼, <표>에 나오는 상납 감귤류 열매의 경우, 1개 당 평균치 무게를 기존 ‘제주감귤 상품 출하 규격 규정’에 따른 ‘1번과’의 최대 무게 50g으로 잡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이런 사실을 기준으로 삼은 뒤, <표>에 보이는 약재류 가운데 각 청피의 합 85근과 각 진피의 합 103근을 합산한 188근을 가공하는데 어느 정도의 감귤 열매가 소요되는지 환산해 보면, 그 수치가 감귤 열매 4만5000여 개에 달한다. 이는 <표>의 상납 감귤류 열매를 모두 합산한 8만6063(+?+?)개와 비교해서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양이거니와, 감귤의 용도별로는 압도적으로 많은 물량이라 하겠다.

결국, 제주 감귤이 다양한 국가적 용도 가운데 약재로서의 쓰임새에 가장 대규모의 물량이 들어갔음은 제주 감귤류 열매·약재의 상납내역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귤 껍질 가공재료에 대한 역사 - 수치(修治)는 원리에 따라 신중하게…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애초, 약재를 자연에서 얻은 뒤 가공하는 것을 수치(修治) 또는 수사(修事)라 한다. 귤피 가공의 방법과 재료도 역사적으로 변천해 왔다. 수치에 대한 최초 문헌은 2세기에 편찬된 ‘뇌공약대(雷公藥對)’가 있으나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 5세기 ‘뇌공포자론’에서 “중과피(中果皮)를 제거하고 잉어껍질(鯉魚皮)을 사용해 쓴다”고 했음이 확인된다. 이것이 귤피의 수치 관련 최초의 기록이라 하겠다.

8세기 초반 멍센(孟詵)은 귤피를 햇볕(日)을 사용해 말린 건피(乾皮), 또한 건피를 잘 묵혀서 진피(陳皮)로 사용한다고 했다.

9세기 중기 쥬똰(咎段)의 ‘식의심경(食醫心鏡)’에는 “귤피를 타지 않을 정도로 볶아 가루내고 차 마시는 법처럼 마신다(微熬作末, 如茶法煎呷之)”고 하듯이, 불(火)을 사용해 가루차로 마셨다고 한다.

10세기 후반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에는 중과피를 쉽게 제거하는 방법으로 “귤피를 끓인 물(水)에 담그고 흰 부분을 제거하고 햇볕에 말린다. 그런 다음 밀가루(麵)가 노랗게 될 때까지 볶아서 사용한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12세기 후반 ‘귤록(橘錄)’에는 “시골사람들은 설탕(糖)을 사용해 귤을 조려 ‘약귤’이라 한다(鄕人有用糖熬橘者, 謂之藥橘)”함이 확인된다. 13세기 중반 ‘직지방(直指方)’에는 좋은 흙(土)으로 귤피를 볶아서 쓴다고 했다. 14세기 중반 주전헝(朱震亨)은 소금물(鹽水)에 담근 귤피를 말려 사용할 것을 제시한다. 15세기 초반 ‘보제방(普濟方)’에는 중과피가 있는 상태로 묵힌 진피를 술(酒)을 사용해 삶아 말려 사용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여러 사서에서 귤피 가공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16세기 중반의 천쟈모(陳嘉謨)는 ‘本草蒙筌(본초몽전)’에서 “제약의 목적은 적중함을 중히 여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공효를 거둘 수 없을 것이오, 태과하면 기운과 맛을 상실한다”고 했다. 이는 귤피의 수치를 원리에 따라 신중하게 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16세기 후반의 리스쩐(李時珍)도 “각기 수치하는 법은 본 처방에 따라야 한다(各隨本方)”고 했다. 곧, 진단에 따른 수치 방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추위로 인한 병에는 귤피를 생강즙(薑汁)으로 볶아서 사용한다고 했다.

17세기 허준도 귤피가 수치를 거친 뒤의 효능을 인정해 ‘동의보감’에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위의 방법 말고도 식초, 녹차 등 많은 방법을 동원해 귤피의 수치를 행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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