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춘추전국시대’…복합문화공간 역할 ‘톡톡’
‘극장 춘추전국시대’…복합문화공간 역할 ‘톡톡’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5.02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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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제일·대한·동양극장 등 연이어 개관…관객 발길 잡기 위한 과당경쟁 불가피
(좌측)1956년 12월 22일 제주시 칠성로에 문을 연 중앙극장, (우측) 1960년대 제주시 원정로 풍경

“대한늬우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뉴스는 1950년대부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극장 상영용 16㎜ 뉴스로 반세기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아냈다. 당시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어렴풋한 추억의 풍경이다.

1956년 12월 22일 제주시 칠성로에 ‘중앙극장’이 문을 열면서 그 당시 제주시내 유일한 극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제주극장’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나무의자를 갖춰 놓은 중앙극장의 등장은 그동안 울퉁불퉁한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영화 또는 서커스·쇼를 관람해야 했던 관객들에겐 편의시설이 생겨난 셈이다.

당시 중앙극장에는 방음이나 음향효과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지만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그나마 도민들의 문화공간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이어 칠성통 협동상회 사장이던 장홍윤씨가 1억2000만원을 투입해 착공한 지 1년 2개월만인 1961년 8월 12일, 1256㎡ 규모의 ‘제일극장’을 개관했다. 개관 기념으로 ‘별의 고향’이 상영됐다.

(좌측) 1964년 제주시 동문공설시장 2층에 문을 연 동양극장, (우측) 1961년 8월 12일 개관했던 제일극장 터

1964년에는 코리아극장의 전신인 ‘대한극장’이 제주시 북신작로(현 칠성로)에 598석 규모로 개관한 데 이어 제주시 동문공설시장 2층에도 ‘동양극장’이 문을 열었다.

극장이 늘어나면서 경쟁도 가열돼 ‘10원 균일’, ‘20원 균일’ 이벤트 등을 마련, 관객을 끌어모아야 했다.

당시 칠성로는 문인·묵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애용됐던 다방들이 모여 있고 다수의 극장도 자리하면서 자연스레 문화와 낭만의 중심지가 돼 갔다.

그 시절 극장가는 요즘과는 또 다른 화려함도 갖고 있었다. 눈에 띄는 독특한 건물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극장 간판은 거리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특히 도내에서 내로라하는 화공(畵工)들이 손수 그려낸 대형 간판 속 남녀 주연 배우의 명장면은 관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극장의 간판을 보며 어떤 영화를 볼 지 결정하게 됐고 그래서인지 극장마다 앞다투며 간판을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는 메인간판 중앙에, 다음 프로그램은 왼쪽이나 오른쪽에 예고하며 행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야말로 1960년대는 ‘극장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장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극장 간 과당경쟁도 불가피해졌다.

이에 극장연합회는 1965년 11월 19일 회의를 열고 1회 개봉관, 2회 개봉관, 재상영, 3상영 등 극장별 등급을 결정했다. 또 한국영화관은 대한·제일극장이, 서양영화관은 동양극장이, 재상영관은 제주극장이 맡도록 못을 박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은 운영이 어려워져 융자금 상환을 위해 극장을 매각해야 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동양극장은 제일극장 사장이던 장홍윤씨가 인수한 후 새로 단장해 규모로 압도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동양극장은 무대와 객석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당시 직사각형 모양이던 다른 극장들과 차별화됐다. 좌석수도 무려 1200석에 달해 하춘화·혜은이 등 대규모 공연들을 개최, 도내 극장계를 평정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진풍경은 또 있다. 바로 학생 단체 영화관람이다. 학생들은 한 달에 한두 번 학교에서 정해 준 영화를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가서 보면 대폭 할인해주는 ‘문화영화’ 관람 행사를 기다렸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파리는 안개에 젖어’ 등과 같은 명작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이다.

이처럼 이시대의 극장은 영화 상영만을 위한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극장은 여태껏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리며 소통하던 도민·문인·묵객들이 ‘영상’을 통해 새로운 문화 산실의 공간을 얻는 복합적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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