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 25년 외길 ‘철의 여인’, 친노동 개혁정부 꿈꾸다
노동운동 25년 외길 ‘철의 여인’, 친노동 개혁정부 꿈꾸다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7.04.2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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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사 큰 족적 ‘구로동맹파업’ 주도…17대 총선 때 국회 입성

[제주일보=변경혜 기자] 심상정만큼이나 다이나믹한 인생을 산 정치인도 드물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고 맘껏 뽐내던 여대생은 한국노동사의 한 획을 그은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하는 등 25년간 노동운동가로 살아오다 2004년 민주노동당을 통해 정계에 진출한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야권단일화의 요구에 첫 대권 도전의 기회를 포기해야 했던 심상정은 ‘대통령 당선보다, 정권교체보다 더 큰 꿈, 60년 승자독식과 성장만능주의의 대한민국 대전환’이라는 슬로건으로 친노동정부를 만들겠다는 담대한 꿈을 밝혔다. 유일한 여성 후보,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로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대중의 평가는 후하지만은 않다. 진보정치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목표도 갖고 있는 심상정의 도전이 어떤 결론을 낼지 관심이다.

# 17대 국회가 민주노동당을 만난 날
비례대표 1번, 심상정은 2004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으로 정치판에 첫발을 내디뎠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제도권 정치에 첫 진입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의석은 10석. 당시 민노당이 처음 시작했던 일들은 국회의 낡은 권위주의 청산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회는 의원들의 옷차림까지 매우 엄격하던 시절이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국회의원 당선 후 면바지를 입고 국회본회의장에 등원했다가 한나라당 수십명의 의원들이 집단퇴장하는 소동이 벌어졌었고 생활한복을 늘 입는 강기갑 의원은 승용차 없이 걸어서 국회에 들어가다 경찰에게 제지당한 일도 있었다.
민노당은 국회의원 전용 엘리베이터, 철도 무임승차, 영수증 없는 국회의원들의 특별활동비들을 하나씩 바로잡아나갔다. 일부 반발도 있었지만 권위주의와 부패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심상정의 첫 상임위는 콧대 높기로 유명한 재경위.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이 모여 국가경제-재정정책을 총괄하는 부처들을 상대해야 하는 만만찮은 상임위다. 노동운동판에서야 심상정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관료사회에서는 무식하게 ‘팔뚝질’하다 국회에 들어온, 목소리 큰 여성 의원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첫 결과는 그해 상임위에서 ‘40년 경제베테랑’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경제정책 오류 인정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부가 파생상품 시장을 통한 외환 개입으로 1조8000억원대 손실을 입힌 사실을 밝혀낸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심상정은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와 이재용 삼성부회장의 편법승계 문제 등을 제기하며 ‘삼성 저격수’로, 대부업체의 지나친 고리채문제, 공공택지민간분양금지와 분양원가공개-후분양제 전면도입 등의 개혁입법으로 주목을 받으며 ‘여야 의원이 뽑은 최고의 국회의원’, ‘정치부 기자가 뽑은 올해의 정치인’, ‘초선의원이 뽑은 베스트 의원 1위’ 등 3관왕을 차지했다. 한미FTA,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첨예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진보정당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내 갈등으로 심상정은 민노당을 탈당, 진보신당으로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고양 덕양갑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근소한 차로 패했다. 심상정을 누른 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 법률대리인으로 참여한 손범규 변호사였다. 그 둘은 19대·20대 총선에서도 연이어 맞붙었으나 심상정이 모두 승리해 수도권 최초의 3선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됐다.

심상정 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걸어온 길. 사진 왼쪽부터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가운데), 대학 입학 때인 1978년의 모습, 전노협 집회에서(사진 오른쪽), 가족사진,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무처장 시절. <심상정 캠프 제공>

# 9년 수배생활, 만삭의 몸으로 법정 출석
노동운동 시절 심상정은, 요즘말로 ‘걸크러쉬’였다. 구로공단의 대동전자, 대우어패럴 등에서 위장취업한 심상정은 임금인상과 환기시설 조차돼 있지 않은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다가 연이어 해고를 당한다.
그러자 심상정은 해고자 신분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구로공단 인근의 여러 노조 간부들과 함께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하고 노조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성장기 대한민국의 노동환경은 열약했고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노동착취는 일상화돼 있던 시절이다. 심상정은 한여름 모피코트를 만들던 회사에서 먼지가 날린다는 이유로 선풍기조차 없이 45도의 찜통에서 살인적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당시 상황을 또렷이 증언하기도 했다.
한국노동운동사의 큰 족적을 남긴 구로동맹파업의 시작은 노동환경 개선이었고 이를 계기로 주동자로 지목된 심상정은 9년간의 긴 수배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구로동맹파업의 핵심인물인 김문수(전 경기도지사)는 경찰에 붙잡혀 심한 전기고문을 당하면서도 심상정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심상정의 배우자 이승배씨를 소개한 것도 김문수였다.
구로동맹파업 5일째 심상정은 텔레비전에 수배자로 등장한다. 혐의는 집시법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등 9개, 현상금 500만원, 1계급 특진이 걸린 거물이 돼 있었다. 7년간의 긴 수배생활을 하며 결혼과 임신을 한다. 1993년 그가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지자 만삭인 채 출석한 심상정을 본 재판관이 “진짜 심상정이냐”고 물어본 일화는 유명하다. 심상정은 이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 쟁의국장과 민주노총 금속연맹 사무처장 등으로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 야구를 사랑하던 소녀
1959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심상정은 공부를 잘해 부모의 자랑이었다.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를 온 심상정은 ‘장효조’, ‘김재박’ 등 당시 야구 스타에 빠져 학생기자로도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른바 긴급조치 세대인 1978년 대학에 입학한 심상정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을 신고 멋내기를 좋아하던 여대생이었다. 대학 1년 말 당시 대학교 학생처장이 심상정을 불러 시위대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네, 혹시 운동권 애인 뒀나?”라고 물었던 일화, “맘에 드는 남학생을 따라가다보니 시위대를 쫒아다니게 됐다”는 이야기는 그의 책 ‘당당한 아름다움’에 나와 있다.
역사교사를 꿈꾸던 심상정은 운동권 학생으로 조금씩 변해갔고 1980년 서울대에 총여학생회를 처음 만들어 첫 회장을 맡기도 했다. <끝>

이승배씨.

배우자 이승배씨가 말하는 그때, 그순간
2003년 9월, 금속노조 사무처장 임기 종료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아내는 자신의 향후 진로를 상의해왔다. “민주노총으로 가서 노조 일을 계속할 것인가?”, “민주노동당으로 가서 정치를 시작할 것인가?” 저는 “그 어떤 선택도 존중한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답이 아닌 답이었다.
2004년 4월 15일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내가 진보정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날. ‘드디어 우리 부부의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구나’하고 실감이 났다. 낯선 길을 가는 새로움에, 그 자격을 공인 받았다는 기쁨에 설렜고 같은 빌라 주민들이 축하 현수막을 걸어준 것도 생생하다. 저는 아내의 동지이기도 하다. 가사와 양육부터 보좌관 업무, 운전과 수행 등 닥치는 대로 메꾸기도 했다. 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아내를 돕는 것이 최선이며 그것이 우리 부부의 분업·협업이 유지되는 이유라 생각한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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