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봄나물, 고사리 했수광
제주의 봄나물, 고사리 했수광
  • 제주일보
  • 승인 2017.04.2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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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하. 수필가

[제주일보] 고사리 장마가 시작되었다. 원래 장마는 일상을 힘들게 하지만 고사리 애호가들에게는 활력을 준다.

촉촉이 내려앉은 빗물을 머금은 고사리 새순은 주먹 쥔 아기의 부드러운 손처럼 대지에 돋아난다. 수줍은 연둣빛 고사리들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언덕배기를 차지하고 있다.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가 쉽지 않았던 제주에서는 예부터 초봄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고사리는 뜯어서 말려두었다가 집안 대소사 때 사용했던 필수적인 음식재료였다.

소싯적 어머니는 대나무 구덕을 지고 동 트기 전 동네 아주머니들과 들녘을 나섰다. 그날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해마다 찾아오는 일상이다. 해가 중천에 올라오면 한 짐을 지고 마당 안으로 들어와 머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색 바랜 낡은 갈옷을 떨고는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이마에 남은 비지땀을 씻을 여유도 없이 항아리에서 떠낸 물로 고사리를 깨끗하게 씻고는 솥에 담고 불을 지폈다.

첫날 따온 것은 조상들의 것이라며 마당 한 가운데 멍석을 깔고 봄볕에 삶은 고사리를 말렸다. 연둣빛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갈 때야 피곤했던 얼굴에 화색이 들었다. 이틀 정도 말린 고사리는 부엌 찬장이나 대나무 구덕에 깊숙이 보관하였다. 그것은 명절이나 조상의 기일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음식이 되었다.

다음날도 어머니는 구덕을 지고 들녘을 나섰다. 부엌에는 고사리 솥이 따로 있었고, 마당은 고사리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물컹물컹했던 고사리가 말라빠져 부피가 작아지는 것을 왜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고사리와 같이 치렁치렁 주름진 얼굴을 하시다가 선종하셨다.

어머니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전에 그렇게도 고사리와 함께 하시던 모습이 생각나서 들녘을 나섰다. 해마다 다니는 어느 마을공동목장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이라 아직은 채취가 쉽지 않을 것이지만 제사상에 올릴 만큼은 해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발길을 재촉했다. 휑한 들, 고사리는 나를 반기지 않았다.

풀 섶을 이리저리 헤쳐보기도 하고 말라버린 작년 고사리 덤불을 걷어내기도 했지만 고사리는 쉽사리 보여주질 않는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찔레나무 덤불에서 곧게 자란 고사리를 발견했다. 작고 도톰한 얼굴을 내밀고 수줍게 고개를 숙인 모습은 가히 속세에 물들지 않은 여인의 모습이다. 진한 화장에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거리의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영롱한 새벽이슬로 화장을 하는가.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얼굴에는 하얀 이슬방울이 맺혀 있다. 보일 듯 말 듯 작고 여린 보송보송한 털이 밉기는커녕 매혹적이다. 수더분한 촌색시를 닮은 그녀의 얼굴은 가까이서도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여인의 민낯이다. 마치 어릴 적 보았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시절 자식들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희생하셨던 어머니,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들려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했었다. 마당 안 멍석 위에서 쪼그라지던 고사리와 같이 주름지던 부모님의 모습이 오늘 따라 그리워진다. 봄의 체취가 바로 이런 것인가. 그렇게도 힘들었던 고난의 시절을 묵묵히 걸어갔던 두 분의 삶이 애처롭다.

지난 겨울은 너무도 혹독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로 갈려진 이들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될 수가 있을까.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분열되는 오늘의 사회에서 고사리를 생각해 본다.

부모님의 품과도 같이 포근해지는 4월, 굳었던 동토를 뚫고 고개를 내민 고사리처럼 절망에서 희망을 찾는 여유로운 인사말로 ‘고·사·리’는 어떨까.

맙습니다, 랑합니다, 해합니다.

제주일보 기자  isuna@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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