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4.25 1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태용. 수필가 / 제주동서문학회장

[제주일보] 봄바람이 불어온다. 혹독한 겨울바람 속에서도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려 설중매화(雪中梅花)를 비롯한 다양한 봄꽃들이 방긋이 웃으며 따스한 샛바람을 맞는다. 앳된 얼굴을 가진 소녀의 얼굴과 같다. 바람도 제각기 성깔이 다르다. 봄바람은 따스하고, 여름에 불어오는 마파람은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가을을 재촉하는 소슬바람을 안겨다 줄때는 참으로 고맙다. 그래서 가을에 불어오는 하늬바람이라고도 불리는 소슬바람은 풍요로움을 선사해 준다. 겨울에 불어오는 쌀쌀한 칼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나는 초가을에 불어오는 소슬바람을 좋아한다. 이유가 있다. 여느 늦은 여름날, 하늘 아래 조그마한 마을에서 밝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소슬바람과 다가와, 나와 인연이 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영혼과 육신의 첫 번째 만남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시인이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연과 얼레의 인연처럼 아주 서로를 떠나는가 싶다가도 늘 서로로부터 이만쯤 떠 있어 왔다. 무슨 전생의 인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불볕더위와 혹한 겨울을 오가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모질지도 강하지도 않는 언제나 나무꾼에게 고마움으로 남아 있는 소슬바람.

때로는 소리도 없이 살포시 왔다가 살포시 사라지는 소슬바람. 몇 십여 년 넘도록 오랜 세월동안 가슴에 보듬은 섭섭함을 안고 있으면서도 나를 향연하고 있음이 고맙고, 변하지 않고 세상을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내가 그렇듯, 바람도 외로움은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봄과 샛바람이 짝이고, 마파람은 여름과 짝이다. 하늬바람과 소슬바람은 가을과 짝이고, 높새바람은 겨울과 짝이다.

산 넘고 바다 건너 내 곁에 다가올 소슬바람의 기운을 느끼게 될 날이 가까워지는 것일까. 봄이 여느 때보다 빨리 온 듯싶다. 여름이 멀리 있구나 싶더니만 이내 따스한 마파람이 계속된다. 여름이 빨라지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아름답고 착한 바람으로 이루어져, 만백성의 가슴에서 살아온 소슬바람.

그대는 나의 운명이며 나의 숙명이라 하지만, 허공에 둥둥 떠만 있어야만 하는 뭉게구름과 같은 운명이 서글프기만 하다. 그렇게 되면 가을도 빨라진다.

이제 긴 한숨을 고르고 길목에 서서 충만함으로 소슬바람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