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을(乙)’에 있다.
길은 ‘을(乙)’에 있다.
  • 정흥남 논설실장
  • 승인 2015.12.3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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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으로 점철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땐 누구나 지난날을 잊고 새로 맞이하는 해에 자신만의 소망과 희망을 가슴에 담고 다짐을 한다. 이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고사성어가 고진감래(苦盡甘來)다. 말 그대로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는 뜻이다. 서민들에게 IMF때 보다 더 어려웠다는 2015년이 저물었다. 2015년이 가고 2016년을 맞았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새해엔 더 어렵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극한 곤경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더 많다. 그래도 사람들은 지금은 물론 어렵고 고생스럽겠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행복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게 된다. 좌절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이 ‘희망의 비상구’로 고진감래에 자신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사회에서 ‘갑(甲)’이 득세하면 불평등을 낳게 마련이다. 불평등은 사회정의를 훼손하고 공동체 안정을 해친다. 곧 사회 구성원들 간 갈등을 낳아 사회발전을 어렵게 만든다. 201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상위 1%의 자산은 전체 자산의 26.0%를 차지한다. 반면 하위 50%의 자산비중은 1.9%에 불과하다. 사회전체가 심각한 불평등 구조로 이뤄졌다. 구조적인 불평등 해소는 법과 제도에 의해 이뤄져야하지만, 그 출발점은 어려운 사람을 돕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갑의 선한 마음이다. 이는 곧 지도층의 솔선수범에서 시작된다. 지도층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공감이 건강한 사회를 이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선 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곳곳에서 ‘갑질’, 아니 ‘슈퍼갑질’이 판을 치고 있다. 문제는 ‘갑질’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공론화 시킨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둔다면 ‘갑질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을들의 좌절이 깊어진다.

노자는 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철학과 낮을 곳으로 임하라는 겸손의 철학을 강조했다. 이래서 생겨난 말이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솔직히 늘 상류사회에 머물거나 편입되기를 꿈꾼다. 강물로 치면 하류보다는 상류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더 좋은 것 먹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좋은 곳에서 사는 것이 성공이 돼버린 시대다. 상류사회,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도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우리가 늘 꿈꾸는 상류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이 빚어낸 신기루 같은 것일 수 있다며 오히려 아래로 흐르는 하류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큰 나라는 하류여야 하고, 그래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하류의 주류는 당연 을이다.

제주가 부동산 투기장화 하고 있다. 부동산 투기장은 말 그대로 갑들이, 갑들을 위해 만든 ‘갑들의 잔치판’이다. 물론 들러리가 되는 것은 늘 을이다. 올해는 을들이 어깨 피고, 갑들이 을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손 내밀고, 도와달라고 애걸하는 해다. 국회의원 선거가 바로 그것이다. 선거는 말 그대로 사회 흐름을 결정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선택의 장’이다. 선거에서만큼은 갑과 을의 처지가 뒤바뀐다. 철벽같은 방어망을 구축해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면서 다른 갑의 진입조차 가로막는 바람에 갑의 수가 을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 이에 따라 1인1표의 투표가 이뤄지는 민주사회에선 사회가 나갈 방향이 을에 의해 결정 된다. 그래서 올해엔 갑들이 숨을 죽인 채 을들의 움직임에 긴장하는 해다. 최근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흙수저 자성론’에 불을 지핀 대학생이 글이 회자되며 을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나는 흙수저란 말이 싫다./ 부모님이 그 단어를 알게 될까봐 죄송하다./ 나는 부모님에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흙을 받았다./ 그래서 감사하다./’ 을이 배짱을 가지고 덤벼야 세상이 바뀌고 갑이 된다. 불평등한 세상에 무릎 끓으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영영 바로 세울 수 없다. 길은 을이 만든다.

정흥남 논설실장  jh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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