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3백신' 신화 이어 낡은 정치깨는 '미래대통령' 꿈꾸다
'V3백신' 신화 이어 낡은 정치깨는 '미래대통령' 꿈꾸다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7.04.24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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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벤처기업인 '신드롬'…새 시대 출발 이끌 '아이콘' 부상

[제주일보=변경혜 기자] 낡은 여의도 정치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처럼 등장해 안철수 현상을 일으켰던 안철수는 의사, 국내 최초 백신 개발 프로그래머, 성공한 벤처기업인, 서울대 교수 등 화려한 이력의 주인공이었다.
2012년 9월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이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와 분당, 국민의당 창당 과정 등 5년간 줄기찬 변화들이 있었다.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는 “안철수의 시간이 왔다”며 “2012년보다 100만배, 1000만배 더 강해졌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대세론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양강 구도를 형성한 안철수의 실험은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 청춘콘서트로 나타난 안철수 현상
카이스트 석좌교수가 된 이후 2009년 안철수는 공중파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 소위 대박을 쳤다. 그의 성공신화가 대중적 인지도를 확 올려놓은 것이다.
이후 2011년 ‘시골의사’ 박경철과 25개 도시를 돌며 진행한 청춘콘서트의 인기에 대해 언론은 ‘안철수 현상’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신의 경험을 청년들에게 이야기하며 고단한 청춘을 위로하는 토크콘서트였다. 콘서트는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안철수 신드롬’이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국민 불신과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아이콘이란 긍정적 측면과 함께 정치 경험이나 국정 경험이 없는 정치 신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 두 가지를 항상 눈여겨봤다.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파동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서울시장 후보로 집중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지지율 50% 안팎을 넘나들며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안철수는 낮은 지지율을 보였던 무소속 박원순의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 단일화를 만들어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나경원이었고 당 대표였던 홍준표는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났다. 안철수는 이후 2012년 대선에 주목했다. 서울 종로에 ‘진심캠프’를 꾸려 본격적인 정치 무대에 나섰다. 그러나 ‘박근혜-문재인-안철수-이정희’ 구도에 대해 야권에서는 후보 단일화를 통한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안철수의 대권 도전은 뒤로 미뤄지게 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가 걸어온 길. 사진 왼쪽부터 유년 시절, 서울대 의과대학 재학 시절 하계 의료봉사 활동, 육군 제3사관학교 훈련소 시절, 신혼여행 당시 부인 김미경씨와 함께, 안철수연구소(안랩) 근무 당시. <안철수 캠프 제공>

#문재인과 만난 안철수, 2015년 12월 결별
2013년 4월 보궐선거를 통해 안철수는 국회에 입성했다. 지역구는 야권세가 강한 서울 노원병으로 2012년 노회찬 의원(정의당)이 통합진보당으로 당선된 지역이다. 노 의원이  ‘삼성 X-파일’ 공개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이 상실되자 이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여야 모두 승리해야 하는 지역구로 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야권분열로 새누리당 등 5명이 출마한 선거에서 안철수는 60%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다.
안철수는 2014년 새정치연합을 창당하고 두 달 뒤 민주당과 합당해 김한길 대표와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로 활동한다. 단숨에 대선 주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정치 신인 안철수에게 시련이 닥쳤다. 지방선거 직후 열린 2015년 7·30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새정련이 참패하면서 김한길-안철수 지도부는 사퇴하게 된다.
이후 새정련은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문재인 지도부체제로 바뀌었다. 총선을 앞둬 문재인과 입장 차를 보여온 안철수는 결국 2015년 12월 당을 떠난다. 문재인은 탈당을 막기 위해 서울 상계동 안철수의 집 앞에서 40분을 기다렸으나 안철수는 만나주지 않았다.
안철수는 당시 “나침반도, 지도도 없다. 새누리당 세력의 확장을 막고 더 나은 정치, 국민의 삶을 돌보는 새로운 정치로 보답하겠다”며 탈당한 후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천정배 의원의 ‘국민회의’, 박주선 의원의 ‘통합신당’과 합당해 몸을 불렸다.
김종인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2016년 4·13총선 전 ‘민주당-국민의당 통합’ 제안을 하자 이를 두고 김한길과 천정배 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안철수는 ‘야권통합은 없다’며 거절, 당의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4·13총선에서 국민의당은 원내 38석 확보라는 성적과 함께 민주당의 텃밭을 흔들어놓았다. 정치적으론 거대 양당의 균열을 일으킨 제3당이라는 정치적 명분도 얻어냈다. 정당득표율은 민주당보다 앞서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의사 그만두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1962년 부산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안철수는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후 독학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한다. 부인인 김미경씨와는 서울대 의대 1년 선후배 사이로 가톨릭학생회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의대 박사과정을 밟던 1988년 안철수는 브레인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하자 이를 퇴치할 백신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 배포했다. V3 첫 버전이다.
안철수는 당시 새벽 3시에 일어나 6시까지 바이러스 백신을 제작했고 업무시간에는 의사일을 하는 이른바 ‘투잡’을 7년이나 병행했다고 말한다. 1995년 의사생활을 접고 서울 서초동에 ‘안철수 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안랩)’라는 벤처기업을 설립, 본격적인 백신 개발에 집중했다.
그러나 안철수는 초창기 직원들 월급을 줄 돈이 없어 힘들었다고 한다. 은행에서 속칭 ‘어음깡’을 여러 차례 했었다는 그는 “제발 한 달만이라도 직원들 월급 걱정 안하고 살았으면”이 당시 간절한 소원이었다고도 했다.
안철수는 백신을 배포하면서 공공성을 강조했다. 미국 회사 맥아피로부터 거액에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다. 안철수는 안랩을 매각하면 백신 주권이 해외로 넘어가 결국 국내 백신시장이 외국업체가 좌지우지하게 돼, 공공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안철수는 2005년 안랩 창립 10주년 당시 대표이사직을 전문경영인에게 넘기고 미국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과정을 마친다. 귀국 후에는  카이스트 석좌교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지냈다.

김미경씨.

<배우자 김미경씨가 말하는 그때, 그 순간>
"힘든 길 가는 남편, 늘 함께 뛸게요"
제가 내조를 잘 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남편이 퇴근할 때 맞춰서 먹을 걸 준비하는 게 고작이다. 특별한 보양식도 아닌 한 가지 요리정도를 하고 같이 먹으며 얘기를 나눈다. 그래도다른 내조가 있다면 새벽에 함께하는 조깅이다. 중랑천 옆이 저희 집인데 종종 30분 정도 함께 뛴다. 남편이 저보다 빨라서 뛸 때마다 뒷모습을 보게 된다. 정확히 며칠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냥 남편의 뒷모습이 유독 크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숨도 차오르고 땀이 막 나는데, 그냥 ‘힘든 길 남편이 잘 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믿는다’는 느낌, ‘늘 당신 뒤에서 함께 뛸게요’하는 마음이 들었다. 좀 더 빨리 뛰어서 말을 할까했는데, 숨이 차서 하지 못했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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