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비리에 맞섰던 ‘모래시계’ 검사, ‘서민 대통령’에 도전
불의·비리에 맞섰던 ‘모래시계’ 검사, ‘서민 대통령’에 도전
  • 변경혜 기자
  • 승인 2017.04.21 09:1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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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권유로 정치 입문한 풍운아…계파 없는 ‘독고다이’로 주목

계파 없이 정치권에 몸을 담은 지 올해로 22년. 지독한 가난을 딛고 모래시계 검사로 대한민국의 주목을 받았던 홍준표는 1996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개혁공천으로 정계에 진출, 모든 정치인들이 꿈꾸는 대통령 후보에 나섰다. ‘성완종 리스트 의혹’으로 정치인생이 끝난 것 아니냐는 평가 속에서 보란듯 재기에 성공, 새로운 드라마를 써나가고 있다.

 

#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

1982년 6년간의 기다림 끝에 홍준표는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떨어지면 멀리 해외에 떠날 곳까지 생각해둔 홍준표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홍준표만큼이나 기뻤던 이는 바로 그의 부인 이순삼씨였고 합격하자마자 둘은 정식 혼인을 했다. 빈털터리 애인을 6년이나 뒷바라지하고 그 사이 큰 아이는 2살이 됐다.

1984년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첫 부임지인 청주지방검찰청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이주영을 알게 된다. 당시 청주지법 형사단독 재판장이었던 이주영은 성명학을 공부하고 있어 홍판표(홍준표 개명 전 이름) 검사의 ‘판단할 판(判)’을 ‘준’으로 바꾸게 해준 장본인이다. 이름 한자에 ‘칼’이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고 발음도 어려워 개명을 권한 것. 하지만 그때만 해도 개명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이주영이 법원장에게 부탁해 개명 허가를 얻어냈고 그 덕에 지금의 ‘홍준표’가 됐다고 한다. 그 이주영은 현재 홍준표의 대선기획단장을 맡고 있다.

초임 검사시절부터 소위 ‘윗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눈 밖에 나 지방검찰청을 떠돌던 홍준표는 1988년 5공비리 수사의 발단이 된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을 맡게된다. 현직판사와 이학봉 청와대 민정수석, 전두환의 친형 전기환 등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였으나 부당한 수사압력으로 그는 4개월 만에 형사부로 좌천됐다.

연이어 광주지검 강력부로 좌천된 홍준표는 조직폭력배 소탕작업에 착수,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서울지검으로 자리를 옮겨 슬롯머신 수사에 착수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청와대와도 관련이 있었던 이 사건은 결국 6공의 황태자 박철언을 구속기소하며 대단원의 마무리를 했고 이 이야기는 드라마 ‘모래시계’로 방영, ‘귀가시계’라고 불릴만큼 대단한 인기몰이를 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걸어온 길. 사진 왼쪽부터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맨 오른쪽), 대구 영남고 재학시절 친구들과(왼쪽에서 두 번째), 고려대 재학시절 하숙집에서, 초임 검사시절,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홍준표 캠프 제공>

# YS의 권유, 정치인으로 변신

1996년 신한국당(자유한국당 전신)은 15대 총선에서 개혁공천을 선언, 새로운 인물 발굴에 나선다. 군부정권인 5·6공화국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참신한 인재가 필요했던 YS는 모래시계 검사 홍준표가 매력적이었다. YS로부터 전화를 받은 홍준표는 입당을 결심한 날

“제정구, 노무현, 김홍신 등 9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입당을 제안해 밤새 잠을 거의 못잤다”고 말한다.

서울 송파갑에 출마해 첫 국회의원 배지를 단 홍준표는 4선·경남지사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걸었으나 계파도 없이 늘 혼자였던 그는 정치권의 이단아였다. 언론인 김어준이 만들어준 별명 ‘독고다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다. 정치권에서도 ‘저격수’라는 말을 들으

며 날카로운 언변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막말이라는 비난도 이어졌다. 방송토론에서는 ‘누가 홍준표를 당해내랴’라고 동료 국회의원들이 평했다. 부인 이순삼씨는 아침마다 그에게 “오늘은 밖에서 말 좀 줄이세요”라고 할정도였다. 계파정치에 대한 날을 세웠으니 계파 수장들

역시 그가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인 2004년 17대 국회선거에서 그는 서울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 탄핵 역풍을 뚫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다선 의원으로 당내에서 급부상했다. 그러나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당내 경선에 나섰으나 오세훈에게 밀려 안타깝게 패배했고

다음해 이명박-박근혜 양강구도가 형성된 17대 대선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했으나 4위에 그쳐 이명박(MB)을 지지했다. MB정부 출범 이후 홍준표는 총선에서 당선, 4선 의원이 되면서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추대됐고 2011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 계파도 없이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하며 당을 주도해나갔다. 유승민 바른정당 대통령 후보가 당시 경쟁 상대였다. 그러나 디도스 사태,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안고 5개월 만에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 체제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2012년 19대 총선 역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선거운동 당시 패배를 예상하고 지역구 주민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몇 달간 정치적 야인생활을 하다 김두관 경남지사가 사퇴한 자리에 보궐선거로 경남지사에 당선됐다. 이후 2014년 지방선거에서 재선 도지사를 거머쥐며 재기에 성공했다.

‘성완종 리스트 의혹’ 사건이 불거져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주변에선 “홍준표는 이제 끝났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2심에서 무죄 판결로 반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함께 거대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는 또 다른 기회를 맞게 됐다.

 

#홍준표는 왜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권도전을 선언했나

홍준표는 지난달 1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서민 대통령’, ‘흙수저 대통령’을 내세우며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경남지사를 지낸 홍준표는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의 서문시장이 자신의 ‘어릴 적 놀이터’였고 자신의 최고 멘토인 어머니가 ‘고리사채로 머리채를 잡혀 끌려 다니던’ 곳이라고 말한다. 흙수저 대통령, 홍준표를 만들어달라는 호소다.

학창시절 도시락을 못 싸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는 홍준표는 학교 매점에서 군침만 흘리며 쳐다봤던 단팥빵과 쌀밥을 고집한다고 말한다. 학교 문턱에도 못갔다는 무학(無學) 아버지와 글을 모르는 문맹(文盲) 어머니였지만 인생 최고의 멘토는 지독한 가난에도 자신을 키워낸 어머니라고 자랑스러워한다.

우파 스트롱맨, 홍 트럼프, 보수 적장자를 자임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 홍준표가 날마다 어떤 말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순삼씨.

<배우자 이순삼씨가 말하는 그때, 그순간>

한라산 여행,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다

작은 아들의 해병대 입대를 앞두고 제주도 한라산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는 발목을 삐어 깁스를 하고 있었지만 소중한 가족여행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작은 아들이 힘들어 하는 아빠를 뒤에서 밀다 시피하며 한라산을 올라가는데, 어느 순간 애가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 걱정됐지만 다리가 아파 마음만 급하지, 작은 아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달했을 때 작은 아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빠를 밀고 오는 것이 하도 힘들어 먼저 도망쳐왔어요.”

그때 등허리가 축축한 게 땀 때문이었는지, 한라산의 촉촉한 빗방울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주만 생각하면 그날이 떠오른다.

변경혜 기자  bkh@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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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참 2017-04-22 00:56:19
임마야 ! 돼지 발정제 효과가 있긴 있나?

ㅗㅗㅗㅗㅗ 2017-04-21 10:58:30
모래시계검사래...어떡하지...?

양한나 2017-04-21 10:57:00
허얼. 서민대통령이래. 어쩔. 제주일보 어쩔. 언론기관이라는곳이 참....
한심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