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즐거움, 죽음과 맞바꾸다
책 읽는 즐거움, 죽음과 맞바꾸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4.20 1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의 독서광(讀書狂)들
① ‘용재총화’(남만성 역, 대양서적, 1982)와 ‘국역 대동야승’ 제1권(민족문화추진회, 1982) ② ‘용재총화’ 판권 ③ ‘국역 대동야승’ 제1권 판권

[제주일보] 요즘 헌책방에서 그나마 잘 나가는 종류 중 하나가 디스플레이용 책이다. 이런 책을 찾는 이들은 책 내용은 상관하지 않고 외관상 좀 있어(?) 보이는 책들을 원한다.

심한 경우에는 책 알맹이는 필요 없고 케이스만 달라는 사람들도 있다.

이쯤 되면 책은 읽을거리가 아니라 인테리어 소품인 셈이다. 헌책을 파는 일이 생업인지라 내용보다 외관에 더 신경을 쓴 책들을 골라서 주기는 하지만, 책 읽는 즐거움으로 일생을 살았던 옛 독서광(讀書狂)들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조선 초기에 문재(文才)로 유명했던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과거에 오르지 못했을 때 문을 닫고 글을 읽다가 소변을 보러 뜰에 내려왔다 떨어진 나뭇잎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이 된 줄 알았다고 하며(‘稗官雜記’ 卷4), 젊었을 때는 매번 남에게서 책을 빌어와 날마다 한 장씩 찢어서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보다가 다 외우면 내버려서 한 질을 외우고 나면 한 질이 다 없어졌다고 한다.(‘慵齋叢話’ 卷4)

당대의 젊은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集賢殿)의 동료들에게조차 책 읽기를 지나치게 즐긴다는 의미의 ‘서음(書淫)’이니 ‘전벽(傳癖)’이니 하며 놀림을 당했던 성간(成侃, 1427~1456)은 희귀한 서적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어이 구해서 보았고, 항상 장서각(藏書閣)에 앉아서 좌우에 서적을 두고 해가 지고 밤이 새도록 책을 열람하다가, 독서로 인한 과로로 병이 나서 요절(夭折)하고 말았다.(‘筆苑雜記’ 卷2)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엽기적(?)인 독서광이었던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머리가 둔한 본인의 한계를 엄청난 독서량으로 이겨 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본인의 부족한 점을 좋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극복했는데, 만 번 이상 읽은 글이 ‘노자전(老子傳)’ 등 모두 36편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백이전(伯夷傳)’은 11만 3000번을 읽었다고 하며, ‘장자(莊子)’나 ‘중용·대학(庸學)’ 등은 적게 읽은 것은 아니나 만 번에 이르지는 못해서 ‘독수기(讀數記)’에 적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柏谷集’ 附錄)

세상 사람들이 ‘간서치(看書癡 책만 읽는 바보)’라고 놀려도 웃어 넘겼던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이덕무(李德懋, 1741~1793)도 독서의 유익한 점으로, 첫째 굶주린 때 책을 읽으면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둘째 날씨가 추워질 때 읽으면 추위도 잊을 수 있으며,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읽으면 천만 가지 생각이 사라지고, 넷째로는 기침병을 앓을 때 읽으면 기침 소리가 그친다고 할 정도의 독서광이었다.(‘靑莊館全書’ 卷50)

책이 장식품으로 이용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장식거리가 아닌 읽을거리로서의 책이 더욱 소중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들 집안을 살펴보자. 화려한 장식장 안에서 우리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책은 없는지.

오는 4월 23일은 독서를 장려하고 지적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책의 날(World Book Day)’이다. 올해는 마침 일요일이니, 이 날 하루 몇 시간 만이라도 온전히 책 한 권 읽어보면 어떨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