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홍윤애와 조정철
다시 홍윤애와 조정철
  • 제주일보
  • 승인 2017.04.18 1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훈식. 제주어보전육성위원 / 시인

서귀포시는 대단하다. 이중섭으로 제주도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는 덕분이고, 추사 김정희 유배 기념관 개설도 자랑스럽다. 더하여 미래를 내다본 해녀박물관 개관은 더욱 빛을 발한다.

이중섭은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山本方子)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하여 2남을 두고 북한 땅이 공산 치하가 되자 자유를 찾아 원산을 탈출, 일 년 정도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부두 노동을 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제주도 유배 길에서 친구 권돈인에게 모질도(耄耋圖)를 그려서 준다. 옛날에는 칠팔십을 살려면 얼마나 모질어야 하는지 짐작이 간다.

양자 문제로 제주도를 떠나는 서자인 상우에게 그려 준 ‘시우란(示佑蘭)’은 삶이 어려울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면 도움이 생긴다는 애비의 기막힌 배려가 숨어 있고,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준 세한도(歲寒圖)는 오랜 세월, 춥고 고통스러웠던 날을 회상한다는 의미이다. 추사는 1848년(63세) 12월 6일 사면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만으로 8년 3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제주도에서 보냈다.

홍윤애의 순절을 눈물로 지켜낸 조정철은 그의 나이 27세, 1777년(정조1) 9월 11일에 제주도로 귀양 온다. 할아버지들이 귀양 오고 아버지까지 귀양살이를 했던 제주도에 자신까지 귀양 오게 된 운명에 부인 홍씨는 친정과 시댁이 역적의 집안이 된 참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배 생활 3년이 지나 홍윤애는 조정철을 사모하여 1781년(정조5) 2월30일에 귀여운 딸을 분만한다. 그러나 정적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도임하여 조정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려고 홍윤애를 장 일흔 대로 고문했는데 홍윤애는 그만 기진하여 세상을 뜬다.

조정철은 눈물을 삼키며 절치부심, 27세부터 시작하여 55세가 되도록 실로 29년간에 걸친 긴 세월을 귀양생활을 견디고 1811년(순조11)에 제주목사로 임명된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홍윤애의 무덤에 절을 하고 비문을 세운다. 이때 제주도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와서 함께 슬픔을 나누었다. 제주도 유배를 사는 동안 수백 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니 고(苦)에서 도(道)를 찾은 경지다. 작년에는 모 방송국 취재로 전국에 알려졌다. 머지않아 홍윤애의 묘역에는 추모의 꽃다발을 든 관광객으로 넘실거릴 것이다.

지역마다 콘텐츠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함평은 ‘나비 축제’로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나비들을 한라산에서 채집했다는 함평군수의 말씀이 지금도 쟁쟁하다. 곡성에 여행 갔을 때도 군 관계자에게 심청이가 이곳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임당수에 바칠 효녀를 곡성에서 찾았다는 거다. 춘향전의 사랑가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명대사도 오페라 나비부인도 제주도의 유배문학인 홍윤애와 조정철의 숭고한 사랑 앞에서는 한참이나 머뭇거려도 된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