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길 아련한 옛 추억…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고
보리밭길 아련한 옛 추억…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고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4.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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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의 올레이야기-15. 올레 제10-1코스(가파도 올레) -상동포구~가파포구(4.3㎞)
가파도에서 바라본 본섬 모습

[제주일보] # 가파도 좋고 마라도 좋고

‘가파도 청보리 축제’ 기간에 올레길을 걸어 볼 양으로 모슬포 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토요일(15일) 아침 9시였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행사라 넓은 주차장이 꽉 차서 차 세울 틈이 없다. 승선 수속하려고 줄을 섰더니, 오전 11시 표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섬에 머무는 시간도 2시간으로 제한된다. 오가는 얘기로는 가파리 이장 선출에 문제가 생겨 축제위원회가 구성이 잘 안 되는 바람에 대충 넘기기로 했단다.

그래도 3시간 정도는 돼야 올레길 한 바퀴 걸은 후 소라 한 접시라도 먹고 나오는데, 축제 기분이 안 날 것 같다. 배에 올라 10여 분 거리를 가면서 ‘가파도(갚아도) 좋고 마라도(말아도) 좋고’라는 관용구를 생각한다. 고재환 선생의 ‘제주도 속담사전(1999)’에는 그게 ‘채무’에 관한 내용 외에 ‘두 섬이 다 좋다’는 뜻으로도 보았다. 최남단의 의미가 있고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는 두 섬이 다 ‘뜨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 언어유희만은 아니겠다.

 

▲상동 매부리당부터=우리가 내린 곳은 상동포구, 시간을 아끼자고 바로 매부리당으로 갔다. 모슬포항에서 5.5㎞ 거리에 있는 가파도지만, 옛날 무동력선으로 어렵게 주거지를 옮긴 사람들이 믿을 구석이 신당밖에 없었을 터이고 보면, 지금 신목(神木) 한 그루 없이 돌로만 둘러진 이곳도 분명히 성소(聖所)다. 이 당은 상동 어부와 해녀들을 수호해주는 해신당으로 본향당 역할을 한다.

해안길은 둥근 자갈로 쌓은 밭담이 조금 남아 섬 분위기를 살리고, 잡초가 어지럽던 빈터는 정리하여 갯강활을 심었다. ‘장태코 정자’를 지나 조금 더 간 곳에 일몰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세웠고, 또 한참 걸으면 ‘고냉이돌’이라는 바위가 나타난다. ‘폭풍에 떠내려 오는 고기를 기다리다 굶주림에 지쳐 바위가 됐다’는 전설을 지녔다.

 

▲보리에 얽힌 이야기들=올레는 조금 더 가다 해안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올라 보리밭이 있는 섬의 복판을 가로 지르도록 설계됐다.

‘청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푸른 보리’를 뜻하는 말이다. 보릿고개로 힘들던 시절,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산모의 젖이 나오지 않아, 막 여물기 시작한 청보리를 베다 말려 장만한 다음, 죽을 쒀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그런데 지금은 살기가 좋아져 바람에 하늘거리는 그 모습을 즐기려 찾아다닌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제주에서는 겉보리를 주로 경작했다. 껍질이 알맹이에 붙어 있어 방아에 찧거나 맷돌에 갈아야 음식을 만들 수 있기에, 일 많은 제주 여성들은 밭이나 물질을 다녀온 후에도 한참 갈아야 먹거릴 마련했다. 겉보리농사도 거름이 없이는 잘 안 돼 ‘돝걸름’이라는 돼지우리 바닥을 퍼낸 거름에 쪄서 뿌리기도 했다.

해방 후 쌀보리 종자가 도입되고 비료가 제대로 공급되면서 논이 귀한 제주의 보리농사도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척박한 땅에도 요소비료만 뿌리면 잘 자랐고, 해변에 위치한 밭마다 보리를 심어 20~30섬 수확하는 집이 많았다. 그리고 맥타기로 쉽게 보리를 장만하면 넣을 그릇이 없어 방에다 쌓아 놓기도 했다. 도정 기술도 좋아져 보리를 닦아 밥을 지으면서는 쌀밥이나 다름없었다.

그 보리쌀을 장에다 지고 가서 팔면 제법 돈이 돼 초·중·고생 대부분의 학비는 그걸 팔아 충당했다. 그러던 것이 쌀이 과잉 생산되고 그 수요가 줄면서 보리농사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제주에서는 수지상 과수와 채소 위주의 농사를 짓게 됐다. 요즘은 간혹 맥주보리 밭이 보이는데 비해, 쌀보리는 구경하기 힘들다.

 

# 아직도 풀리지 않는 가파도 고인돌 수수께끼

2009년, 서귀포시에서 고인돌 135기가 산재해 있는 대정읍 가파도에 고인돌 공원을 조성한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다. 2015년까지 80억 원을 들여 토지를 매입해 공원을 만들고 해마다 축제도 연다는 계획이었다. 이곳의 고인돌은 밭을 경작하고 길을 내면서 알게 모르게 훼손된 것을 제외하고도 135기가 확인됐다고 한다. 학술조사 결과 1~2세기에 조성된 이 고인돌군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방식 고인돌 문화의 전형을 그대로 간직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 시기에 왜 가파도에다 그렇게 많은 고인돌이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잘 알다시피 고인돌 덮개는 꽤 무거운 것들이라 옮기려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이렇게 좁은 섬에 뭘 하는 사람들이 몰려 살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게 간빙기에 만든 거라면 날씨가 추워 북쪽 사람들이 따뜻한 남쪽 끝으로 몰려와 바닷물 웅덩이에 몰려 있는 고기나, 그 고기를 잡으러 온 물새 떼들을 잡아먹고 살았겠지만…. 이곳에서 비교적 가까운 고산 선사유적지에서 돌화살촉이 무더기로 출토되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가파도는 총면적 0.87㎢의 비교적 작은 섬이다. 그 규모로 농사나 어업만 가지고는 살기가 버거울 것이다. 이런 때 축제를 충실히 기획하여 주민 모두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축제기간을 넘기고서도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친환경적으로 섬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쪽이 바람직하다.

멀리 한라산이 굽어보고 가까이 산방산이 손짓하는 섬 복판에서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한흑구 선생의 수필 ‘보리’ 구절을 떠올린다.

 

‘보리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에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른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넘친다.’ -한흑구 ‘보리’ 부분.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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