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막의 배우 연기에 웃음·눈물…시름 달래준 문화공간
은막의 배우 연기에 웃음·눈물…시름 달래준 문화공간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4.11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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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구락부, 영화 상영·극단 공연 포문…1953년 12월 ‘제주극장’ 탈바꿈
① 제주지역에 최초로 영화관 시대를 연 것은 ‘제주극장’이다. 사진은 제주시 삼도2동에 있는 옛 제주극장 건물. ② 1953년 제주극장 앞 전경. 영화를 관람하려는 어른과 아이들, 영화 간판 등이 눈길을 끈다.

‘빗방울같이 흐르는 감격의 눈물을 닦을 손수건을 준비하시길….’

붓으로 거친 듯 섬세하게 그린 간판과 포스터들 사이로 들어서면 ‘촤르르~ 촤르르~’ 돌아가는 영사기 앞으로 뿌연 불빛이 빽빽하게 얽히고설킨 관객들을 비춘다. 영화가 상영되고 뒤늦게 들어오는 한 사내의 머리가 화면을 가리자 이내 객석 뒤쪽은 당장 영화가 끊기기라도 한 듯이 성화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사내는 재빠르게 자리를 찾아 앉고 관객들은 이내 극장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며 눈물을 훔쳐낸다.

1950~1960년대, 10원~15원 들고 나가면 제주 극장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내에서 최초로 극장시대를 연 것은 ‘제주극장’(제주시 삼도2동, 현대극장 건물)이다.

제주극장의 전신은 조일구락부(클럽의 일본식 표현)로 1944년~1947년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당시 의자도 없이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변사(영화에 맞춰 그 내용을 설명하던 사람)가 들려주는 찰진 입담의 무성영화와 유랑극단의 공연이 자주 열렸던 이곳은 도민들에게는 시름을 씻어내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 시절에는 몇몇 일본영화를 제외하면 무성영화가 태반이었다. 외국영화가 상영되기도 했지만 자막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변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변사의 유창한 언어를 곁들인 설명이 영화 흥행을 좌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변사의 입담과 영화 내용이 들어맞지 않아 경찰에 연행, 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조일구락부는 영화 상영과 연극 공연을 비롯해 서운예술연구회 제1회 공연(1947년 1월 11일~14일), 제주읍민청대회(1947년 2월 16일),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대회(1947년 2월 23일), 영춘영화대회(1947년 3월 25일~30일) 등이 열렸을 정도로 그 시대의 멀티플랙스(multiplex, 극장·식당·비디오 가게·쇼핑 시설 따위를 합쳐 놓은 복합 건물) 문화공간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운영되던 가설극장은 1948년 10월 17일 정식 공연장으로 등록됐고, 1953년 12월 영화관으로 개·보수하며 ‘제주극장’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 운영에 들어가게 된다.

1953년 12월 20일에는 제주극장 직영을 위한 별도 법인인 ㈜제주문화기업사가 실내·외를 재단장해 개관 영화로 ‘스프링 필드 라이플’을 상영했다. 제주문화기업사는 이듬해 당시 16㎜였던 영사기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35㎜ 영사기를 들여와 컬러영화 ‘사라의 녹원’ 시사회를 열며 자막영화 시대의 ‘신세계’를 열었다.

1970년대 초등학생 단체 영화관람 모습.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던 제주극장에도 해결되지 않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무료입장’ 관객이다. 제주극장 개관식을 앞둔 1953년 11월 9일자 ‘제주신보’(현재 제주일보)에 따르면 “현재 ‘여인애사’를 상영 중인데 입장자 수 350명 가운데 유료 고객은 불과 45명…호평의 영화를 상영할 때는 초만원을 이루는 가운데 약 3분지 2의 관객이 무료입장이라 한다’고 할 정도로 무료 입장객 문제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후 지정좌석제가 도입되긴 했으나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누구나 한 번쯤 마음 속 기억의 보따리에서 꺼내 봤음직한 풍경은 또 있다. ‘학생 입장 불가’ 영화를 보기 위해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최대한 몸을 낮춘 채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하면서도 볼 거 다 챙기는, 간 큰 제자를 잡기 위해 맹렬히 감시·지도하던 교사들의 모습도 그 시절에만 볼 수 있었던 추억일 것이다.

이처럼 공간은 필요에 의해서 건축되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만으로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 지난 해 안전 대진단 실시 결과 최하인 ‘E등급’을 받으며 철거 위기에 놓인 제주극장 건물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이다. 1970년대 현대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한 제주극장 건물 정면 좌측에는 아직까지 당시 매표소 창구가 남아 있다. 문화시설이기도 했지만 제주 근현대사를 겪으며 제주인들의 역사를 담아낸 장소적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따뜻한 봄날, 아이의 손을 잡고 ‘제주극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들의 젊은 시절 극장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기대해 본다.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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