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이 지나고, 죽을 때까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70년이 지나고, 죽을 때까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습니다”
  • 송현아 기자
  • 승인 2017.04.0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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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 기억, 3·1의 현장’…열여섯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 개최
3월 31일 오후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3·1의 기억, 3·1의 현장' 열여섯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이 열린 가운데 송영호 할아버지, 양유길 할머니, 허영회 할아버지가 참여해 증언에 나섰다.

[제주일보=송현아 기자] “70년 전 일이지만 죽을 때까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 희생자 유족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주4·3연구소는 지난달 31일 오후 2시 제주도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여섯 번째 제주4·3 증언본풀이마당’을 개최했다.

이날 본풀이마당에서 증언에 나선 송영호(82)·허영회(84) 할아버지와 양유길(82) 할머니 등은 70년 전 당시 충격과 상처를 안겨준 기억을 끄집어냈다.

1947년 제주남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송영호 할아버지는 3.1절 기념대회 현장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날 아버지를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송 할아버지는 “3.1절 기념식에 참가한 학생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태극기 깃발을 하나씩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 북초등학교에서 정문 쪽으로 나오면 칠성통 굽잇길에 ‘갑자옥’이라는 점포가 있었다. 점포 오기 전 도지사 관사를 지나는 데 어린 아이가 기마경찰 말발굽에 치어서 넘어졌다. 그런데 경찰은 아이를 인도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고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기마경찰이 남문통에서 중앙성당 쪽으로 내려가던 농업학교 학생들과 어른들이 봤다. 군중들이 화가 났는데, 당시 목관아 경찰서 망루에서 조준 사격을 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 사망자 6명 중에는 송 할아버지의 아버지 송덕수씨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송덕수 총 맞았다’는 말이 순식간에 퍼졌다. 그래서 도립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총알이 팔에 맞아 배까지 관통했다. 대회를 구경하면서 총에 맞은 것 같다“며 ”결국 도남 청년들이 아버지를 옮겨 왔고, 장례를 치렀다. 우리가 기뻐하고 만세를 불러야 하는 날에 그런 불상사가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고 슬퍼했다.

3.1절 기념대회 당시 제주북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양유길 할머니는 눈앞에서 아이를 안고 쓰러진 아이 엄마 박재옥씨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며 증언을 이어갔다.

양 할머니는 “청년들이 기를 들고 막 나가는데, 우린 어릴 때였으니까 제일 나중에 나갔다. 나가는 중에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 ‘뛰어라!’는 소리에 몸을 숨어 관덕정을 보니 가운데는 사람이 없었다. 총소리에 무서워 다 숨어버린 것이다. 자세히 보니 미군이 하늘 위로 총을 쏘고 있었다. 당시 비행장 근처에 미군들이 많이 살았다”며 “다시 총소리가 났는데, 옛날 제일은행(식산은행) 앞에 있던 여자가 ‘턱’ 하고 쓰러졌다. 두 살 정도 되는 아이가 함께 있었다”고 기억했다.

양 할머니는 이후 4·3을 겪으며 큰 오빠(양해길)와 작은 오빠(양묘길)를 떠나보냈고 부유했던 집안은 풍비박산 나 제주에 살지 못해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이후 10년 전 제주에 온 양 할머니는 “우리 집은 4·3으로 완전 망조가 들었다. 대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우리 오빠들은 너무 억울하다. 친척들도 우리 집을 빨갱이 집이라며 오지 않았다”고 울먹였다.

화북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 혼자 3·1절 기념대회에 참석한 허영회 할아버지는 관덕정 광장에서 마주친 경찰 복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허 씨는 “골목에서 마주친 경찰은 밤색 긴 가죽 장화를 신고 일본 경찰 복장으로 말을 타고 있었다. 몸이 오싹했다. 해방이 돼서 일본사람이 다 떠나고 없다고 생각했는데, 일본 경찰 모습을 보니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허 할아버지는 “아우성 소리가 난 뒤에 총소리가 났다. 당시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는 망루 위에서 총질을 가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 죽는 것을 처음 보니 무서워 서둘러 집에 갔다. 그때 각 기관·단체에서 항의를 했는데 경찰은 ‘정당방위’라고 맞섰다. 당시 경찰이 한 발짝만 물러나도 큰일은 없었을 텐데, 끝까지 정당방위라고 했고 단체·기관들이 마음을 돌이키게 된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허 할아버지는 4·3 당시 부모님뿐만 아니라 큰 형, 큰 형수, 큰 누나, 큰 매형, 둘째 형, 둘째 매형, 작은 누나, 작은 매형, 작은 형까지 총 11명을 잃었다.

허 할아버지는 “작은 형, 나, 동생 세 명이 부모님 유해를 수습했다. 관에 부모님을 모시고 개판(蓋板)을 덮은 뒤 술 한 잔 올리고는 누워 뒹굴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작은 형은 나중에 예비검속돼 행방불명됐다”고 과거를 떠올리며 아파했다.

이어 허 할아버지는 “지금 교육대학교 있는 터가 여인들만 총살시킨 곳인데, 거기에 비 하나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선생을 키우는 곳이니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말해줘야 한다”며 “그리고 4.3은 항쟁으로 불러야 한다. 무장대도 이름을 바꿔야 한다. 무장을 몇 개나 했다고 무장대라고 하는 거냐. 이런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증언본풀이마당에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 “최근 독일은 나치 경비원으로 일했던 90대 노인을 검거해 집단 학살 방조혐의로 5년 실형을 선고했다.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이 있을 때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을 우린 숱한 역사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내년 4.3 70주년을 앞두고 제가 제주도를 찾은 이유는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증언본풀이는 4.3을 겪은 분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역사를 들려주면서 해원하며 잊지말자는 자리다. 우리가 할 일은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여는 일이다. 앞으로 국회의장으로서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확산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송현아 기자  sha@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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