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로이 이야기
킬로이 이야기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3.29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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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제주국제대학교 특임교수 / 국제정치학 박사

[제주일보] 세계적인 명소에 낙서를 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탈 행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지만 낙서가 두뇌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자못 흥미롭다. 영국 플리머스대학교(University of Plymouth)의 재키 앤드레데(Jackie Andrade) 교수가 2009년 ‘응용인지심리학(applied cognitive psychology)’지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강의 중에 낙서를 하면서 듣는 사람들이 낙서를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29% 더 많은 내용을 기억한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 중에 공책 가장자리에 꽃, 얼굴, 삼각형, 별, 원 등등 온갖 낙서를 하는 행동이 학습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늘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쓸모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배워 왔다. 경쟁이 거세지면서 자의든 타의든 이 사회에서 쓸모없다는 자괴감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최근에 미국인 친구 벤 스테판(Ben Stephens)이 ‘킬로이가 다녀갔다(Kilroy was here)’라는 낙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들이 점령지마다 긴 코를 담장에 드리운 모습의 얼굴모습과 함께 ‘킬로이가 다녀갔다’는 낙서가 나타났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국립전쟁기념관에도 이 낙서가 새겨져 있다. 1913년과 195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 킬로이를 열광적으로 좋아하였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1946년에 미국교통협회(American Transit Association)가 ‘미국에 말한다(Speak to America)’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후원하면서 실제 ‘킬로이(Kilroy)’를 찾으려고 하였다. 40여명의 후보자 중에서 매사추세츠 핼리팩스의 제임스 킬로이(James Kilroy)가 실제 킬로이로 밝혀졌다. 그는 미 해군 조선소에서 일하던 검사관으로 검사를 한 뒤 검사한 곳을 또 검사하지 않으려고 ‘킬로이가 다녀갔다(Kilroy was here)’라는 표시를 한 것이었다. 병력수송용 선박에서 이 표식을 본 병사들이 여기 저기 낙서를 하면서 베를린에서 도쿄까지 미군이 가는 곳에는 항상 킬로이가 나타났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들에는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에도 에베레스트 산정에도, 달에도 ‘킬로이가 다녀갔다(Kilroy was here)’는 낙서가 있다고 한다. 농담이겠지만 1945년에 포츠담회의를 위하여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이 머무를 부속건물을 지었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스탈린이 킬로이 낙서를 보고 부관에게 “도대체 킬로이가 누군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서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만일 누구든지 그런 기분에 빠진다면 장자(莊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장자(莊子)의 ‘내편제사(內篇第四)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산목자구야(山木自寇也), 고화자전야(膏火自煎也). 계가식(桂可食), 고벌지(故伐之), 칠가용(漆可用), 고할지(故割之). 인개지유용지용(人皆知有用之用), 이막지무용지용야(而莫知無用之用也).

산의 나무는 재앙을 자초하고, 등잔불은 스스로를 태우네. 계수나무 먹을 수 있어 잘리고, 옻나무는 칠을 할 수 있어 껍질이 벗겨진다. 세상 사람들은 다 쓸모없는 것의 용도는 알면서도, 쓸모 있는 것의 용도는 알지 못한다네.’

정년퇴직을 하게 된 후에는 사회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나의 미국친구 벤은 미 해군에서 정년퇴직을 하였다. 그는 내게 하루에 두세 번의 메일을 보낸다. 태평양 너머 벤의 일상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외로운 것이 분명하다고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는 사소한 모험에 도전하며 즐겁고 활기차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정년퇴직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권하고 싶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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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2017-04-05 23:21:14
칼럼을 보고 용기를 얻습니다.
쓸모있는 것은 쓸모있는 것대로 쓸모없는 것은 쓸모없는 것대로
나름 의미가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