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조차 없이 억울한 옥살이 했죠"
"재판조차 없이 억울한 옥살이 했죠"
  • 현대성 기자
  • 승인 2017.03.2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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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역사증언 및 제주4·3사건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

[제주일보=현대성 기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같이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새벽에 모르는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 저를 구둣발로 차더니 끌고 갔습니다”

제69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추념식을 엿새 앞둔 28일 오후 제주하니크라운호텔 별관에서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4·3역사증언 및 제주4·3사건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자 실태조사 보고회가 열렸다.

이날 증언에 나선 현창용 할아버지(85)는 60여 년 전 일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48년 9월 26일, 당시 16세였던 현창용 할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잠을 자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게 연행됐다.

경찰의 잔인한 고문에 결국 허위 자백과 허위 진술을 하게 된 현 할아버지는 같은 해 12월 8일 인천형무소에 수감돼 이후 대구형무소로 옮겨져 출소할 때까지 26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현 할아버지는 “억울한 옥살이를 끝낸 후에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고생했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다”며 “오히려 사상범이라는 따가운 시선에 숨어 살았다”며 그간의 고생을 털어놓았다.

이어 증언에 나선 양근방 할아버지(83)는 “조천 와산집에서 저녁밥을 먹다 군인들이 쏜 총에 형님도 죽고 형수도 죽었다”며 “나도 당시 총에 맞아 쓰러졌고 내가 죽은 줄 알았던 군인들에 의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양 할아버지는 “함덕 헌병대에 자수한 후 형님 이름을 대자 빨갱이라고 했으나 목숨만은 구했다”며 “주정공장에 갇힌 후 인천형무소로 이동해 1년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고 호소했다.

박동수 할아버지(83)는 “아버님하고 형님하고 산에서 불을 피우다가 군인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아버지와 형님을 잃고 고아가 됐다”며 “지서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인천형무소에 압송됐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인고의 세월을 견뎠다”고 울먹였다.

양일화 할아버지(83)는 “계엄 이후 큰아버지가 사는 제주시로 피난 온 후 친척이 운영하는 방앗간을 찾아갔다 청년들이 ’너 어디 사냐‘고 물어보길래 ’금악에서 왔다‘고 말하자 잡혀갔다”며 “그 일행은 서북청년단이었고 그 이후 재판도 없이 무고하게 옥살이를 했다”고 증언했다.

4·3도민연대는 2013년 4·3진상조사단을 구성하고 제주4·3 인천형무소 수형희생인 실태조사를 수행해 불법 군사재판으로 인천형무소에 수감된 수형인을 408명으로 확인했다.

인천형무소 수형인 중 생존자는 모두 10명이며, 이 중 7명은 제주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현대성 기자  canno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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