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기 교정에는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신학기 교정에는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 제주일보
  • 승인 2017.03.2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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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하. 수필가

완연한 봄이다. 연둣빛의 망울을 달고 있는 벚꽃은 시샘하는 바람을 못 이겨 꽃비 되어 사정없이 흩날릴지라도 눈부시도록 하얗게 만개라도 하고 싶은 듯 생기가 돌고 있다. 3월 초에 입학한 풋내기 학생들이 운동장을 휘젓고 있다.

아직은 초등학생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행동이라고 핀잔을 주기보다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이 부럽다.

부모 입장에서 자녀를 상급학교로 입학시킨다는 것은 또 다른 기대감으로 설렐 것이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 청소년기로 접어드는 중학생으로의 변화는 자녀의 미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우리 아이는 미래에 어떤 직업 속에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아직도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개체로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이에게 걸었던 기대가 날이 갈수록 실망감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모든 부모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기대대로 자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품은 꿈의 크기대로 자랄 뿐이다.

그 꿈은 모두가 가지는 최고의 선물이다. 흔들릴 때마다 우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꿈이 없다는 것은 나침반 없이 태평양을 횡단하는 조각배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꿈을 소신 있게 찾아가는 길모퉁이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들을 감싸고 있는 외부의 환경들에 의해 감춰 있기 때문이다.

매스컴에 의한 환상과 부모들의 높은 기대감이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자신의 흥미와 적성보다는 많은 이들에게 환호를 받는 연예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기획되고 절제된 화면에서 열광하는 팬들 속에 파묻힌 가수의 모습에서 내면에 잠재된 자신의 부족함을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꿈 단지의 크기와 용량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어린아이에게 성인의 옷을 입힌다고 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그 크기에 맞는 옷을 입히는 것이 정상적인 양육이며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플라타너스나무 우듬지에 있는 새의 둥지에서 날갯짓하는 아기 새들과 같다. 높은 둥지에서 날갯짓하는 아기 새를 멀리서 바라보는 어미 새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불안하다. 저러다 떨어지면 큰일이 날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부리로 아기 새를 둥지로 밀어 넣지만 어미 새가 없는 동안에도 아기 새는 날갯짓을 계속한다. 그래야 날 수가 있다. 어미 새는 아기 새의 날갯짓 동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가까운 나무 위에서 쳐다본다.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을 알았던 것.

그런 시간들 속에 아기 새는 둥지를 떠나 자신의 세상으로 날아간다. 어미 새는 텅 빈 둥지에서 아기 새의 채취를 한 동안 느끼다가 자신도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난다.

아이들에게 무한한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자. 꿈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미래사회는 소리 없이 찾아오는 생동하는 봄처럼 더욱 밝은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과거에는 자녀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살 수 있는 바다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한다.

아이들이 맘껏 꿈과 끼를 발산하면서 살 수 있는 사회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오늘날 기성세대들이 할 일이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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