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귤 과수원, 조선 세조 이전부터 ‘관아’ 소유로 조성
제주 감귤 과수원, 조선 세조 이전부터 ‘관아’ 소유로 조성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3.22 1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12>제주 과원의 설치와 그 성격(2)
① 제주조점(탐라순력도 수록 화폭)-제주성내 6곳 과원(남과, 중과, 동과, 별과, 북과, 서과)이 표기 됨. ② 17세기 중반 조성된 금물과원터의 현재 모습(서귀포시 남원읍 하례2리 소재).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가 상납하는 감귤의 물량이 조선 초기 세제개편과 맞물려 고려시대에 비해 훨씬 더 늘어났다.

여기에는 조선 초창기부터 감귤의 국가적 용도와 사용처가 대폭 늘어나게 됐던 현실적 여건도 작용했고, 그 현실적 여건 가운데 하나로서 제주 감귤류가 국가적 공중치료의 약재로서도 필요·상납됐던 사실을 들 수 있다고 지난번 얘기했다.

중앙정부도 감귤 물량의 안정적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마침내 제주에 과원(果園)을 설치하고, 그에 의존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우선, 중앙정부는 제주 이외의 곳으로도 감귤 생산지를 확대해 보고자 했다. 제주의 감귤류 나무를 육지부에 옮겨 심는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 일은 1412년(태종 12년)에 처음 이뤄졌다. 1799년(정조 23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남해안 3개 고을의 유자나무가 모두 얼어 죽었다고 보고했던 일도 확인된다.

정부가 감귤 생산지를 확대해 보려던 일은 장기간에 걸쳐 수차례 행해졌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된데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이야기했던 적도 있다. 중앙정부는 제주 감귤나무의 이식사업에 낭패를 볼 때 마다, 새삼스레 제주 감귤에 다시 눈을 돌리고, 그 물량을 만족할 만큼 거두는 방안을 찾아내는데 골몰했을 것 같다. 그래서 제주에 감귤과수원을 설치·운영하도록 했을 것이다.

역사상 제주의 감귤과수원은 1455년(세조 원년) 기록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때의 감귤과수원은 제주 관아 소유였고, 과원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니까, 제주 과원은 1455년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공립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이들 제주 과원은 애초 제주목·정의현·대정현 등의 관아에서 설치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 가운데 감귤나무가 잘 자라는 곳을 택해 과원을 설치한 뒤, 계속 감귤나무를 새로 심거나 접을 붙이는 등의 관리를 통해 과원을 가꾸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래서 제주의 공립 과원이 1481년(성종 12년)경 이전에 이미 제주목 19곳·정의현 6곳·대정현 5곳 등 도합 30개소에 달했음이 확인된다.

이들 1481년 전후 무렵 제주의 공립 과원은 그 명칭 및 소재지가 전혀 드러나고 있지 않으나, 존재·운영양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각종 자료에 산재해 있는 편이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제주의 공립 과원은 방풍과 도적질 방지를 위해 돌담으로 사방을 둘러쌓은 뒤, 인근 주민이 보살폈다. 또한 매년 재배 감귤류 나무의 숫자를 조정에도 보고하게끔 했다. 공립 과원은 관리에 상당한 공을 쏟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빽빽한 공간에 너무나 많은 감귤나무를 심어 뿌리가 뻗치지 못한 채 무성해 벌레가 쉽게 생기는 등 민가에서 자라는 감귤나무보다 수확이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제주 관아는 중앙정부에 바치는 감귤 납부량을 채울 수가 없어 민가에서도 거둬들여야만 했던 것 같다. 원래, 제주 민가의 감귤나무는 수세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중앙정부가 요구하는 감귤 상납량이 증가해 나아가는 반면, 제주 공립 과원의 감귤나무가 공은 갑절 들어도 도리어 민가에서 기르던 것에 미치지 못했을 듯싶다.

사실, 감귤나무는 바람과 추위에 약한 작물인지라, 민가의 양지바른 울타리 안의 감귤나무가 산야의 외진 곳에 위치한 과원의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라고, 일찍 풍성한 감귤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민가와 공립 과원의 감귤나무가 생육 정도와 열매 결실량에 있어 서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각각의 감귤나무 재배·관리인이 지녔던 주인의식의 높낮이와도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제주 관아는 중앙정부에서 요구한 감귤의 납부량을 공립 과원에서 수확한 감귤로 채우지 못하자, 감귤나무를 갖고 있는 민가에 열매가 달리자마자 강제로 지키게 하고, 열매 수를 헤아려 팻말을 달았다가 조금이라도 손실이 나면 벌금도 물렸다. 또한 감귤나무 주인으로 하여금 관아에 실어오게 하며, 만일 기한을 어기면 형벌도 더했다. 그래서 제주 사람이 감귤나무를 잘 심지 않았고, 심지어 뽑아버리는 일도 야기했던 것이다.

결국, 감귤의 민폐가 제주 사회에 끼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초장기부터라 하겠다. 이렇게 된 데는 감귤의 국가적 용도와 사용처가 대폭 늘어나게 됐던 현실적 여건도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현실적 여건 가운데 하나가 약재로서 제주 감귤류의 물량 확보가 크게 늘어나게 된 사실도 들 수 있을 듯싶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이야기하고자 한다.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말린 귤 껍질의 보관과 가공 - 오래 묵을수록 좋아…장기보관법 발전

약재는 원형대로 깨끗하게 건조하거나, 혹은 가공해 냉암소에 보관한다. 특히 귤피는 오래 묵힐수록 약효가 상승하므로 장기보관법이 창안·진전돼 왔었다고 하겠다. 이를 시대적으로 추적해 살펴보자. 5세기 레이궁(雷公)의 경우는 귤피를 잉어껍질로 싸서 보관했다가 꺼내 사용했다. 이는 귤 향기가 기체화해 날아 흩어지는 것을 막는 한편, 좋은 향기가 산화돼 악취가 발생하는 현상을 방지코자 하는 것이다. 이후 변질을 일으키는 수분을 제거하기 위한 건조저장법이 꾸준히 이어져 나아간다.

12세기경 장위안쑤(張元素)가 약물을 인체 내 딱히 필요한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이론을 제창했다. 이로써 귤피와 기타 물질을 배합하는, 곧 귤피 가공법도 생겨났다. 소금, 식초, 설탕, 꿀, 술, 차, 생강, 감초 등이 진피제조에 예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치료목적에 부합되도록 적극적으로 제조·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2세기 후반 한옌즈(韓彦直)는 “벌레가 있어 감귤을 갉아 먹는다(有蟲食柑橘)”고 해 귤이 벌레에 취약함을 말했다.

16세기경 리찬(李 木+延)은 “진피는 진짜와 가짜, 햇것과 묵은 것을 자세히 판별해야하고, 만약 케케묵고 곰팡이가 생기면 모두 사용할 수 없다(眞僞新陳仔細看…陳皮…若陳腐經黴者, 皆不可用)”고 했다. 이들은 귤과 그 관련 약재들이 벌레와 곰팡이로부터 피해를 많이 받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 보관과 가공법을, 오늘날의 과학적 견지에서 보자면, 이물질, 곰팡이독소, 위해물질, 중금속, 잔류농약 등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뜻한다. 그 목적은 오랫동안 잘 보관할 수 있기 위함이다. 곧, 진피는 변질돼 썩지 않게 오래 보존해야만, 진짜 좋은 품질의 약재로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감귤 모양 열매의 껍질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서는 소금과 설탕을 많이 사용해왔었다. 이와 달리, 요즘에 들어서는 소금과 설탕이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 때문에 그 농도를 낮추는 편이다. 또한 설탕 대신 꿀이나 물엿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단 맛이 나는 ‘sugar beet’, 이른바 사탕무(艹+忝菜根)나, 혹은 감초(甘草)를 첨가해 보존성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에도, 저당저염식품은 상대적으로 보존성이 떨어지는 만큼, 진피는 그 밀폐 용기를 개봉하면 냉장고에 보관해야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