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 백발 ‘7080’이 하고 싶은 말
허연 백발 ‘7080’이 하고 싶은 말
  •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7.03.1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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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어머니, 데모에 나가는 저를 책하지 마세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제가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내가 안 돌아오더라도 슬프게 생각하지 마세요.“

1960년 4월 19일 아침. 서울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양은 어머니 앞에 이런 편지를 써놓고 나가 데모대에 합류했다가 미아리 고개에서 무분별하게 쏘아대는 총탄에 맞고 숨졌다. ‘4·19 혁명사’에는 진양의 편지와 어머니 김명옥 씨의 사연이 있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중2’.  북쪽의 김정은도 겁내는 것이 우리나라 ‘중2’라고 하지만…. 그 열다섯 살 ‘중2’가 어떻게 ‘조국과 민족’을 생각 했을까. 4·19혁명을 촉발시킨 주역은 중·고교생들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경남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은 17세였다.

▲1960년 4월 30일 아침. 제주시내 중·고교생들이 학교를 뛰쳐나가 관덕정 광장에 모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흘린 피를 헛되게 하지 말라”.

그 날 관덕정에서 피를 토하듯이 민주주의 선언문을 낭독했던 학생들은 진영숙과 김주열의 동년배들이다.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다섯 글자는 ‘조국과 민족’이었다.

그로부터 57년. 이제 모두 70대 중반이 됐다. 이들은 4·3과 6·25의 와중에 태어나 삼시세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배고픈 제주도의 역사를 안고 있다. 요즘 동남아에서 일자리를 찾아오듯, 이들 가운데는 돈을 벌기위해 식당 보조나 직공으로 취업해 일본으로 떠났던 과거가 있다. 또 독일탄광으로, 간호사로 나가 외화를 벌었던 일, 목숨 걸고 간 월남에서 달러를 받고 고국에 부쳤던 일, 그리고 중동 열사의 땅에서 흘렸던 땀과 희생의 역사가 있다.

6·25와 4·19세대는 이런 사람들이다. 지금 이 나라는 이들의 피와 땀 위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숱한 시위의 중심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있었다. 4·19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을 타도하는 기폭제가 됐던 부마항쟁에서부터 5·18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화항쟁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피를 흘리고 또 흘렸다. 1990년대 ‘386세대’까지만 해도 민주항쟁의 현장에서 ‘조국과 민족’은 늘 대의(大義)였고, 그들의 뜨거운 가슴이었다. 

6·25와 4·19세대는 ‘조국과 민족’의 원조(元祖)다. 지금 7080세대(70대~80대)인 이들은 4·19후 직접 시위에 나서는 쪽이 아니었다. 시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가. 이들이 추운 겨울날 거리로 나왔다. 허연 백발에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또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들었다. 그들의 반대편에서 하는 말처럼 그들은 국정농단 세력을 비호하는 수구(守舊)꼴통들일까. 박정희 개발독재를 추종하고 박근혜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시대도착증(倒錯症) 환자들일까. 박근혜가 수백번 잘못했다고 하면서도 왜 태극기를 드는가.

▲원로 한 분이 오래된 태극기를 보여주었다. 6·25가 나던 1950년 8월, 제주항을 떠나는 고등학교 2학년 17세 소년병(少年兵)에게 잘 싸우고 돌아오라며 가슴에 달아줬던 태극기다.

“(이제는)국기에 대한 경례에도 ‘조국과 민족’이 없어졌고, 나라를 지키자는 애국도 매도되는 것 같고…. 언론도 태극기를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애국이 매도되고 있다? 그럴 리 있느냐고 반문했는데, 문득 한 젊은이의 주장이 떠오른다.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 박정희 등 애국을 강요했던 분들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 분은 없었습니다. 조국과 민족, 애국이란 이름으로 인간을 잔인하게 속박(束縛)하는 세상은 종식돼야 합니다.”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의 대의였던 ‘조국~’은 이렇게 적폐(積弊)가 됐다. 물론 세계사엔 ‘애국’과 ‘조국과 민족’이란 이름으로 인권과 평화를 위해(危害)했던 전제(專制)의 그늘이 숱하다. 그러나….

격동의 20세기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조국과 민족’ 그리고 ‘애국’은 희생(犧牲)이었다. 또 남북대치와 열강(列强)의 틈바구니에서 ‘나라 지키는 일’은 21세기 오늘도 제1의 애국이다. 지금 태극기를 든 ‘7080’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이 말을 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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