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와 미리내
은하수와 미리내
  • 제주일보
  • 승인 2017.03.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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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종. 문학박사 / 서울제주도민회 신문 편집위원장

어렸을 때에는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보며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곤 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요새는 아예 불빛이 없는 산으로 가지 않고서는 여간해선 쏟아질 듯 무리지어 있는 별들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다 닿은 여행지에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만나게 되면 그때의 동심으로 돌아간 듯 가슴이 설레곤 한다.

한자어인 은하수(銀河水)는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만큼이나 어감이 좋지만, 은하수를 뜻하는 고유어인 ‘미리내’도 이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말이다. 10여 년 전에 중앙 모 일간지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조사에서 ‘미리내’가 당당히 8위에 선정된 것은 이 말이 그만큼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미리내’는 태풍의 이름으로도 쓰인다. 아시아태풍위원회(ESCAP/WMO Typhoon Committee)에서는 아시아 14개국에서 각각 10개씩 제출한 그 나라 고유의 이름을 태풍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제출한 10개의 이름에 ‘미리내(Mirinae)’가 포함되어 있다. 아름다운 ‘미리내’라는 말을 굳이 태풍의 이름으로 썼을까 싶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어휘로 인정받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미리내’라는 말은 제주에서 사용되던 고유어로, 고(故) 서정범 교수가 제주 방언을 조사하던 중에 비양도의 한 할머니한테서 채록하여 1974년 자신의 수필에 ‘미리내’를 사용하면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제주에서는 표준어인 ‘은하수’와 함께 일부의 어르신들이 ‘미리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소멸 위기의 ‘미리내’가 문학 작품에 사용되면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미리내’의 ‘미리’는 최근에 온 나라를 뒤흔든 재단의 이름으로 사용된 ‘미르(용)’가 변형된 것으로 ‘미리내’는 ‘용이 사는 내’를 뜻한다. 우리 조상들은 은하수를 ‘용이 사는 내’로 보았는데 여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어휘들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어가 2010년 유네스코의 ‘사라질 위기의 언어’ 중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등록되었다. 그 다음 단계인 5단계가 ‘소멸된 언어’인 것을 보면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소멸 직전의 단계에 있는 위기의 언어로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제주어는 언어학이나 국어사적으로도 매우 가치 있는 말로서, 우리말의 고어에 해당하는 어휘들이 실생활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어 우리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이렇게 귀중한 제주어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필자는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그 동안 위기의 제주어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제주도내에서 꾸준히 있어왔다. 제주도, 제주도의회, 제주도 교육청을 비롯한 제주어연구회, 제주방언연구회, 제주어보전회 등 학계와 민간에서도 제주어에 대한 연구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주도민들의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간의 성공적인 표준어 교육이 우리의 잠재의식에 심어놓은 ‘제주어가 표준어보다 저급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제주어도 훌륭한 인류의 언어’라는 인식을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전승되지 않은 언어는 반드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제주 지역의 매스컴에서, 각종 행사장에서, SNS에서 제주어 사용 빈도가 지금보다 많아지도록 관계 기관의 노력이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말은 얼을 담는 그릇이다. 제주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제주에 살던 조상들의 혼이 담긴 말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며, 곧 우리의 뿌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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