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제주감귤, 쓰임이 매우 절실"…국가적 활용 급증
세조 "제주감귤, 쓰임이 매우 절실"…국가적 활용 급증
  • 제주일보
  • 승인 2017.03.0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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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11>제주 과원의 설치와 그 성격(1)

고원방고(탐라순력도 수록 화폭)-제주목사 이형상 일행의 염돈과원과 옛 왕자터 방문 모습을 그린 것(사진왼쪽)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감귤류 약재의 전의감과 혜민서 상납 관련 기록(제주목 공헌조).

[제주일보] 제주 감귤은 조선의 왕, 곧 세조가 “그 쓰임이 매우 절실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 말마따나 정부는 초창기부터 제주 감귤의 수세량을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제주의 감귤나무를 전라·경상도 연안 지역으로 옮겨 심어 감귤의 국가적 수요에 충당하려고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과원(果園)이 제주에 들어서게 됐다고 본다.

제주 과원은 애초 공립이었으나 국립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던 한편, 감귤과수원 이상의 성격도 지녔었다.

우선, 제주 감귤이 고려시대에 비해 조선시대에 와 훨씬 더 많은 물량이 상납됐던 사실을 얘기하겠다.

조선은 고려에 비해 훨씬 중앙집권화가 진전된 사회였다. 중앙정부의 지방 장악력이 커졌고, 수세행정도 체계적으로 정비됐던 것이다. 수세량도 크게 늘어났다. 제주 감귤의 경우도 조선 초기부터 행해진 세제 개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주 감귤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1392년부터 세목 유형이 바뀐다. 이때부터 제주 감귤은 지방의 특산물을 항상 정기적으로 바친다는 의미도 갖는 ‘常貢’(상공)이 아니고, 절기에 따라 산출되는 지방 특산물로 관부의 수요에 따라 수시로 부과되던 ‘別貢’(별공)으로 상납된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제주 감귤은 진상(進上), 혹은 공헌(貢獻)이나 진헌(進獻) 등으로 바치는 품목 중 하나였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세금의 유형 가운데 각 지방의 토산품을 거둬들이는 공부(貢賦), 혹은 공납(貢納)이라는 세목이 있었거니와, 여기에는 수령이 각 지방의 토산품을 예물로 왕에게 바치는 진상도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고려 때도 제주 감귤이 진상의 형태로 왕에게 올렸다고도 볼 수 있으나, 찾아볼 수는 없다.

반면,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제주 감귤이 진상 품목으로 상납됐음이 확인된다. 진상제와 그 품목이 고려시대에 비해 훨씬 더 체계적으로 정비됐던 것이다.

제주 감귤은 별공과 진상 외에도 공물(貢物)의 유형으로도 상납됐다. 공물은 왕에게 바치는 ‘진상’과는 달리 국가에서 필요한 토산품을 지방민에게 현물로 거둬들였던 세목이다.

조선도 건국된 지 16년이 지난 1408년(태종 8)에 제주 토산품 등의 현물을 바치는 세금, 곧 ‘공부’를 처음 정했다고 한다. 이것의 의미는 1408년부터 비로서 제주에서 공부를 거둬들였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수납했던 제주 토산품 등의 현물 관련 품목과 그 수납량을 조정했음을 뜻한 듯싶다. 제주 감귤도 중앙정부가 기존부터 거둬들였던 토산품이었던 만큼, 1408년에 와 수세량을 그 이전에 비해 더욱 늘렸다고 하겠다. 또한 제주 감귤이 ‘진상’과는 구별되는 공물로도 제주의 민호에게 부과됐던 것이기도 하다.

제주 사람은 조선 초기부터 별공 및 진상과 함께, 공물의 형태로도 감귤을 중앙정부에 올리다 보니, 이전에 비해 감귤 상납량이 훨씬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때 이뤄진 중앙집권화의 진전과도 무관치 않다고 하겠다. 이밖에 제주 감귤이 조선시대 들어와 국가적 용도와 사용처가 대폭 늘어나게 됐던 현실적 여건도 빼놓을 수 없다고 본다.

이 가운데 제주의 한의약사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제주 감귤류가 약재로서의 국가적 수요도 만만찮게 됐다는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1454년(단종 2)에 간행됐다. 여기에는 제주지역의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이 진피(陳皮), 청피(靑皮), 지각(枳殼), 지실(枳實)도 상납했음이 나온다.

이들은 감귤류 나무의 열매이기는 하나, 과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열매 부위의 껍질이나, 혹은 어린 열매 썬 것을 말리는 등의 처리과정을 거친 약재로서, 약용한다. 제주 감귤류가 매해 약재로서도 상납됐음이 처음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653년(효종 4) 편찬의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제주의 감귤류가 왕실·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뿐만 아니고, 일반 서민을 치료하는 혜민서(惠民署)에도 올라갔다. 제주의 감귤류가 국가적 공중치료의 약재로서도 썼던 것이다.

이렇게 된 시기는 혜민서가 설치되는 1466년(세조 12) 보다 꽤 앞섰다고 본다. 혜민서 이전에도 그 전신에 해당하는 기구가 이미 1392년(태조 1)부터 지속적으로 설치·운영됐기 때문이다.

제주 감귤류가 조선 초기부터 국가적 공중치료의 약재로서 활용됐던 만큼, 그것도 더 많은 감귤 물량의 상납을 야기했던 하나의 현실적 이유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주 감귤류의 약리적 효능에 대한 인식의 확산과 함께, 그 임상 효과의 대중적 파급과도 짝해 이뤄진 일이라 하겠다.

 

▲귤피 효용의 변천사-본초강목 “귤 껍질 온갖 병을 치료”

귤피는 허준이 말한 ‘동정귤’뿐만 아니라 ‘온주밀감’, ‘산물’ 등을 포함한 모든 감귤나무의 익은 열매껍질을 뜻한다. 알맹이가 맛있고 잘 익은 감과 귤의 껍질 중 맵고 쓴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그렇다면 약재로서 귤피보다 더 높게 치는 ‘진피(陳皮)’는 어떻게 정의되고 변천돼 왔을까.

기원전 ‘신농본초경’에는 ‘녹용’보다 좋은 상품(上品)으로 귤피를 거론했다. 3세기 초반 장찌(張機)는 “바다고기를 먹고 탈나면 귤피를 진하게 달여 마시면 곧 해독된다”라고 귤피의 구체적 효능을 기술했다. 5세기 레이궁(雷公)은 “귤피가 오래 되면 최고로 좋다(其橘皮, 年深者最妙)”고 밝혔다. 옛적부터 귤피는 오래 될수록 좋은 약재로 쳤다고 할 수 있는 사실이다.

6세기 초반 타오홍징(陶弘景)은 “귤피는 기(氣)와 관련 병을 치료하는데 아주 좋은 약재다(橘皮療氣大勝)”라고 했다. 곧, 귤피가 지닌 약리적 효용성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7세기 중반 쑨쓰먀오(孫思邈)는 많은 처방에서 오래 묵힌 귤피를 사용했고, 8세기 초반 쑨쓰먀오의 제자 멍센(孟詵)은 말린 귤피나 묵힌 진피를 사용하라 했다. 이로써 진피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됐고, 귤피로 환(丸)도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11세기 후반 쑤송(蘇頌)도 “처방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진피는 노랗게 잘 익은 귤을 선택하고…그 오래 묵힌 좋은 진피로 환을 만든다(去肉暴乾黃橘, 以陳久者入藥良, 古今方書用之最多…取陳皮擣末, 蜜和丸)”고 했다.

12세기 후반 한옌즈(韓彦直)는 귤나무에서 나오는 생산물 중에 “귤피는 최고로 유익한 약(橘皮最有益於藥)”이라고 추천했다. 신안 해저의 무역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진피가 14세기 이전부터 국제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는 진피의 약리적 효과가 뛰어나고 감초처럼 많이 사용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경 리찬(李 木+延)은 진피가 효과가 있으려면 썩지 않고 “최소 2년 이상이어야 한다(陳久者良, 隔年者亦可用)”고 품질의 규격도 정의했다. 특히, 리스쩐(李時珍)에 와서는 귤피가 “온갖 병을 치료한다(其治百病)”고 함으로, 마치 만병통치의 약재로서 거론할 정도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경우, 허준도 귤피의 효능을 인정해 ‘동의보감’에 기록하고 있다.

 

제주일보 기자  kangm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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