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
까치밥
  • 제주일보
  • 승인 2017.02.2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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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수. 시인 / 문화기획가

까치밥은 ‘감을 수확할 때, 까치 같은 새들이 먹을 수 있도록 다 따지 않고 남겨두는 감’을 일컫는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을 텐데도 까치밥을 남겨놓는 미덕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새나 짐승같은 미물에게도 인정을 베풀 줄 알았다. 하물며 같은 사람끼리는 오죽했으랴.

어렸을 적 저녁 무렵 이웃 어른들이 놀러 오면, 할머니는 극구 사양하는 이웃 어른들에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식사를 하게 하곤 하셨다. 이미 식사를 하고 오셨다며 난감해하던 어른들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면 그 분들은 억지로 밥을 몇 술 뜰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따라 그 분들 댁에 놀러 가면, 반대로 우리가 억지로 숟가락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왜 서로 그렇게 음식을 대접하지 못해 안달일까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서로의 처지를 다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챙겨주느라 그랬던 것 같다. 지금에야 감귤 같은 특용작물로 넉넉한 섬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정말 입에 풀칠하는 게 어려웠었기 때문이다. 가난했지만 그렇게 끈끈한 정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사람이 그렇지 않겠는가만, 지금도 제주 사투리와 억양을 쓰는 분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흐뭇해지고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제주 사람들의 인정과 따뜻함을 느꼈던 장면들이 불현듯 먼 시간 저 편에서 눈앞으로 튀어나와 펼쳐지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마을 아이들은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우리 애 남의 애 따지지 않고 아이를 먼저 챙겼다. 아이들은 한 가족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온 마을의 아이들이였다. 그만큼 서로 챙겨주고 격려해주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혼내기도 했다. 온전한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과 일맥상통했다. 있는 사람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더 베풀고,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지금은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어서 안타깝지만, 그 분들이 우리에게 주셨던 애정과 사랑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 분들의 가족을 만나면 네가 누구네 아들이고, 어느 분의 손자로구나 하면서, 그 때 받았던 마음을 보답하려고 애쓰게 된다. 나는 이것이 바로 까치밥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우리 머리와 가슴 속에 이런 까치밥 정신을 불어 넣어 주셨다. 그 씨앗이 싹이 트고 움이 터서 맛있는 감나무로 자라고, 다시 까치밥을 남겨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도록 길들여졌다, 우리는.

그런데 이 까치밥 정신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늘날엔 나만 잘 살면 되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까치 같은 새들이 굶어 죽는 것은 둘째 치고,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사람들이 누릴 까치밥 하나도 남기려 하지 않는다. 감나무가 수백 만, 수천 만 그루 있는 집에서도 까치밥 하나 남기려 하지 않는다. 감나무 한 그루밖에 없는 집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남겨주려고 애쓰던 까치밥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은 집은 뭇사람의 질타를 받고 결국은 패가망신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정도의 인정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심을 잃게 마련이고, 결국 그 집단에서 배척되고 퇴출되었을 테니 허무맹랑한 믿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인류학자에 의하면, 까치밥과 같은 행위는 인류의 생존과 진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노력을 해 온 집단은 살아남아 적자생존의 혜택을 누린 반면, 그렇지 못한 집단은 자멸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는 흔히 우리 민족이 반만 년 역사를 이어 내려왔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까치밥 정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가 아니었을까. 현재의 나보다 후손을 챙기고,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보다는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돌아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까치밥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제 어떡하면 좋은가. 까치밥을 남기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남의 것도 뺏어 먹기 위해 법을 어기는 것도 모자라 윤리와 도덕까지 내팽개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다. 돈 10억을 얻을 수 있으면 감옥 가는 것도 괜찮다는 청소년들이 늘어가는 요즘, 나만 잘 살면 되고, 돈이면 다 된다는, 시대 정신(?)으로 인해 우리의 생존과 진화는 이제 막다른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기우(杞憂)였으면 좋겠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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