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시작한 국정일기, 151년간 王의 매일을 기록"
"정조가 시작한 국정일기, 151년간 王의 매일을 기록"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2.1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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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日省錄)
서울대 규장각에서 1993년 비매품으로 영인 출판된 ‘일성록(日省錄)’ 제43권 표지와 판권.

[제주일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찬사서(官撰史書) 가운데 하나인 ‘일성록(日省錄)’은 국보 제153호이자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소중한 우리의 역사 기록물이다.

1760년(영조 36년)부터 1910년(융희 4년)에 이르는 151년 간에 걸쳐 매일 기록된 조선 후기 국왕의 국정일기로, 정조(正祖)가 세손(世孫) 시절부터 쓰던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즉위 후에도 한동안 직접 일기를 작성하다가, 업무가 늘어남에 따라 1783년(정조 7년)부터 규장각에서 일기를 작성하고 국왕이 재결(裁決)하는 것으로 방식을 바꾸었다.

국왕의 개인 일기가 국가 공식기록물로 바뀌게 된 것으로 왕의 재결을 거치도록 하여 ‘국왕의 일기’형식을 유지한 셈이다.

‘일성록’은 중요한 기사에는 강(綱)을 세우고 목(目)을 달아 그 날의 국정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장황한 상소나 장계 등은 주요 내용을 간추려 수록하고, 왕명이나 법령 등은 전문(全文) 그대로 기록했다.

편찬된 후에는 국왕도 선대의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던 ‘실록’은 국정 자료로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매일 승정원에 출입한 문서를 모두 수록한 ‘승정원일기’는 너무 번잡하여 국왕이 국정에 참고하기에 불편했지만, 처음부터 국왕의 일기로 시작된 ‘일성록’은 왕이 필요할 때 국정에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록물이었다.

비록 국왕 중심의 기록물이라는 점, 정조대의 기록 가운데 600여 곳에 칼로 도려낸 부분이 있는 것과 일부가 개수(改修)된 것 등은 사료로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 후기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꼭 필요한 중요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서울대 규장각에서 1982년부터 1996년에 걸쳐 총 86권으로 영인 출판한 ‘일성록’은 각 권이 1000여 쪽 정도되는 사이즈가 큰 영인본이다.

비매품(非賣品)으로 유관 기관에만 배포되었기에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일성록’을 우리 책방에서 인수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마치 ‘실록’을 처음 소장하게 되었을 때와 같은 설레임에 며칠을 둥둥 떠 다녔던 기억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8년에 국역을 시작해서 2016년에 완역된 정조대까지는 현재 번역문과 원문 웹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고, 남은 부분을 번역 완료하는데는 앞으로 20년 정도 더 소요된다고 한다. 온전한 국역판 ‘일성록’을 이용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아쉽기만하다.

‘일성(日省)’이라는 이름은 증자(曾子)가 말한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나 자신을 살핀다(吾日三省吾身)” (‘논어(論語) 학이(學而)’)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대통령들이 남긴 기록물들에 관한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지금... 2백여 년 전 우리 나랏님이 후손들을 위해 남긴 국정기록물의 머리말이 새삼스럽다.

“역사는 엄하고 비밀스러워 옛날의 역사는 볼 수 있으나 지금의 역사는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옛날을 보는 것은 지금을 살피는 것만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반추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이 《일성록》이 지어진 까닭이다.” - 《일성록(日省錄)》 서(序) 중에서.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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