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날, 창문을 열며
입춘날, 창문을 열며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2.1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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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

[제주일보] 해마다 입춘 날이면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는 분, 초를 카운트 다운하시다가 딱 그 시간이 되면 집안의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히곤 하셨다. 이른바 새 철이 든다는 시간이다. 어머니의 말씀인 즉슨 ‘새 철 드는 순간이니 새로운 기운을 집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러고 나면 먼지구덩이 집안에서도 뭔가 스멀스멀 새 기운이 번져가는 느낌을 받곤 했었다.

어렸을 때는 해마다 오는 봄인 걸 왜 해마다 새 철이라고 그럴까, 왜 새 봄이라는 말은 있는데 새 여름, 새 가을, 새 겨울이라는 말은 없는 걸까,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저 부드러워진 땅에다 씨를 뿌리는 시기이니 마땅히 시작의 상징으로 새 철이니, 새 봄이니 하나보다 하는 정도였다. 머리가 점점 커지면서부터는 봄은 청년이고 겨울은 노년이라느니, 봄은 생명이고 겨울은 죽음이라느니 하는 상징에도 익숙해졌다.

게다가 한동안 나는 별로 봄을 기꺼이 맞이해보지 못했다. 겨울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부터 어김없이 찾아오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시달리다 보면 꽃시절을 놓치기 일쑤였고 원인 모를 알레르기에 얼굴이 한바탕 뒤집어지는 바람에 바깥출입마저 꺼려지던 계절이 바로 봄이었다.

몇 년 전, 작은 마을에서 열린 영등굿을 보러간 적이 있다.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운 좋게도 해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절차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해녀들은 요왕신에게 제물을 전해드리러 가면서 목청껏 노래 부르고, 풍어를 빌었다. 작은 고깃배가 바다 한가운데인 해녀들의 작업장으로 나아갈수록 영등달의 바다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파도가 뱃전을 넘실거리자 잔뜩 움츠리고 앉은 내가 저절로 반대 방향으로 밀려날 정도가 되었다. 두려웠다. 거친 파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멀미, 멀어져가는 육지…. 개구리 헤엄은 쳐도 숨비질은 생각지도 못하는 나로선 점차 두려움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해녀들은 마치 소리가 크고 신명이 더 할수록 한 해가 무사하고 풍요하리라는 믿음이라도 있는 것처럼 치열하다못해 처절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 쏟아 소리를 높혔다. ‘이어사나 이어사나….’ 그 목청은 파도쯤은 간단히 이겨 하늘에 닿을 기세였다.

해녀들이 칠성판을 등에 지고 바다밭을 들락거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절로 온 순간이었다. 기원이 이토록 치열하다면, 이토록 절절하다면 그 다음에야 무엇이 두렵겠는가. 당연히 통했다는 믿음이 오고, 보답이 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 영등신을 보내고 요왕에게 치성을 드린 연후에야 해녀들은 진정한 봄이 왔다고 믿는다. 목숨과 먹고사는 문제를 그 속을 다 알 수 없는 자연 속에서 해결하는 그네들은 예나지금이나 변덕스런 신을 부여잡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정한 봄은 신의 마음을 움직일만큼 큰 정성을 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상징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네들이야말로 새 봄을 맞이하고 봄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그 날 이 후 봄은 때가 되면 저절로 다가오는 계절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게 되었다.

봄은 자연의 이치만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봄은 절실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열어젖혀야, 끌어당겨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새 철 드는 날이면 집안의 문을 모조리 열어젖혔던 것이고 해녀들은 그리도 목청껏 소리 질렀던 것이다. 나의 몸살감기도 알레르기도 알고보면 다 철모르는 마음 대신 몸이 치러준 봄맞이 의식이었을 것이다. 하기사 세상만사에서의 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올해 입춘날에는 나도 창문을 열어보았다.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더 많다. 시작하기엔 더없이 좋은 때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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