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정귤, 고려 때 국제적 해상 교류 통해 유입
제주 동정귤, 고려 때 국제적 해상 교류 통해 유입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2.08 17: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9>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8)
(좌) 남송대 한언직이 쓴 ‘귤록’에 수록된 귤피의 약리적 효과 관련 기록<출처=귤록(현행복 역)>, (우) 고려시대 동아시아 지역 해상항로<출처=역사와 해양의식(이동근 저)>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의 전통적 감귤류는 30여 종의 품종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동정귤’을 첫손으로 꼽곤 한다. 제주의 동정귤 유입은 국제적 교류와도 연관됐다고 하겠다.

동정귤이란 명칭은 중국의 둥팅산(洞庭山)으로부터 유래했거니와, 첫 산출지가 화남 지역의 내륙에 위치한 후난성(湖南省) 쥔산(君山, 둥팅산의 개명)이었다. 8세기말 이후부터는 동정귤이 쥔산으로부터 훨씬 동쪽의 해안지대에 자리한 타이후(太湖) 둥팅산에서 많이 났다. 타이후 둥팅산의 동정귤은 중국 내 감귤 중 최고 명품으로도 손꼽혔다.

동정귤나무는 1286년(충렬왕 12) 이전에 개경의 궁궐 주변에도 있었다. 이는 곽예(郭預, 1232~1286)가 지은 ‘영귤수(詠橘樹)’란 시를 통해 드러난다. 시에는 이 귤나무가 중국의 남쪽 바닷가 지방으로부터 옮겨와 심어졌다는 내용도 나온다.

한편 남송(南宋) 상인이 닝보(寧波)에서 출발한 뒤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로 들어가는 항로를 통해 개경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이들은 갖가지 토산물을 가져와 고려왕에게 바쳤다. 이들 가운데 꽃나무도 있었다. 또한 고려의 관리가 궁궐 화원을 화려하게 꾸미고자 남송 상인이 가져온 화초를 비싼 가격으로 사기도 했다. 개경의 동정귤나무도 남송 상인을 통해 유입됐을 듯 싶다. 곧, 남송 상인은 닝보를 떠날 때 인접 지역의 토산물로서 맛과 향기가 으뜸이었던 타이후 둥팅산의 동정귤과 아울러, 그 귤피 및 진피와 같은 약재류, 혹은 동정귤나무의 묘목도 선적하곤 했을 것이다. 이는 신안 해저 유물선이 1323년(충숙왕 10) 닝보에서 출항했고, 진피도 선적했던 사실로서도 뒷받침된다고 하겠다.

남송 상인이 고려의 벽란도, 혹은 일본 간의 항로를 거쳐 나아갈 때 중간 기착지가 제주였다. 제주는 1260년(원종 1) 이전부터 남송 상인이 ‘無時(무시)’로 드나들었다고 할 만큼, 수시로 오고갔던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방증자료로서는 한경면 신창리 주변 해저유적도 들 수 있다. 여기에서는 12~13세기 때 중국 화남 지역으로부터 해상운반되던 도중 침몰했다고 보이는 대접·도자기편 등이 상당량 수습됐던 것이다.

닝보로부터 벽란도와 일본 간 항로는 남송 이후에도 활발하게 이용됐다. 신안 해저 유물선은 남송 멸망 이후 44년이 지난 1323년(충숙왕 10) 닝보에서 출항한 뒤, 일본의 하카타(博多)로 향하던 중 침몰한 원대(元代) 무역선이라 한다. 이 무렵에도 중국 화남 지역의 상인이 동아시아 지역에 걸쳐 해상활동을 전개할 때 제주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을 것이다. 이들 상인은 화남 지역의 토산물을 선적해 해상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타이후 둥팅산의 동정귤도 남송 상인의 무역선에 실렸던 적이 드물지 않았을 듯 싶다. 동정귤은 남송 때 이미 감귤 가운데 으뜸이 됐거니와, 타이후 둥팅산은 남송 상인의 첫 출항지 닝보와는 인접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제주는 고려·조선시대 때 국내 유일의 감귤산출지로 거론되는 곳이었다. 더욱이 남송 상인이 제주를 자주 드나들던 시기는 이미 제주의 감귤 재배가 매해 항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때이다. 이들 여건과 남송 상인의 해상활동을 감안한다면, 동정귤나무는 남송 상인에 의해 제주로 유입됐다고 봐야할 것이다.

동정귤나무의 제주 유입은 보다 더 우수한 품종의 귤나무를 재배하려는 제주 사람의 욕구로부터 비롯했다고 하겠다. 제주 사람은 남송 상인이 제주에 기착했을 때 동정귤나무를 가져와 건네주길 당부했을 것이다. 남송 상인의 경우는 제주에 기착했을 때 각종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제주 사람과 우호적 관계를 원했을 듯 싶다.

이 때문에도 남송 상인이 동정귤나무의 묘목이나, 혹은 종자를 가져와 제주 사람에게 건네줬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감귤류 나무의 열매가 약초로서의 효능과 명성이 점차적으로 드높아져 왔었던 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12세기 후반 남송의 한옌즈(韓彦直)도 ‘귤보(橘普)’를 통해 귤피가 ‘藥(약)’으로는 최고로 유익함을 거론하는 한편, 그 약효의 유용성을 모른다고 개탄했던 것이다.

제주 사람도 제주에 들른 남송 상인 등과의 국제적 교류를 통해 귤피와 진피가 약재로서 널리 쓰이고 있음을 인지했을 듯 싶다. 그래서 보다 더 약리적 효과가 뛰어난 귤피·진피도 얻고자 당시 중국의 감귤류 나무 가운데 첫손 꼽히는 동정귤나무의 유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고, 그것이 1260년 이전부터 제주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남송 상인을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감귤모양의 열매는 왜 품종이 갖가지일까-돌연변이와 자연·인위교잡의 결과

Hesperidium, 곧 감귤모양의 열매는 종류와 함께 명칭도 매우 다양하다. 왜 그럴까? ‘신농본초경’에는 ‘귤유(橘柚)’가 함께 취급됐다. 이후 ‘열자(列子)’에는 유(柚), ‘사기(史記)’에는 귤(橘), 귤·유의 교잡으로 등(橙), 잡감(雜柑)의 주(木+奏)로 분류됐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등·귤의 교잡으로 감(柑)도 나온다. 감귤모양의 열매가 기원전 이미 실생번식뿐 아니라 다른 종과의 자연교잡이나 돌연변이로서 나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차적 분화에 속한다.

3세기 후반 지한(혜함)의 ‘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에서는 감(柑)을 감귤류에 넣었고, 4세기 전반 위안홍(袁宏)은 ‘유감(乳柑)’도 거론했다. 이윽고 8세기 똰꿍루(段公路)는 ‘북호록(北戶錄)’에서 “광둥성 신싱현(新興縣)에서 변감이 나온다(新州出變柑)”고 했다. 이로부터는 변이종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의 ‘동정귤’, ‘산물’도 자연변이종에 해당한다.

10세기 후반 이전부터 접붙이는 법도 행해졌다. 이는 ‘사시찬요(四時纂要)’를 보면 알 수 있다. 12세기 후반 한옌즈(韓彦直)는 “가지에 접붙이기로 감, 혹은 귤을 만듦으로 품종은 다양해지나 모두 자연번식은 아니다.(중략) 감과 귤의 좋은 점을 취한다(以枝接之, 爲柑爲橘, 爲多種, 俱非天也…取諸柑之佳與橘之味者)”고 했다. 품질 개량에도 손을 뻗쳤던 것이다.

15세기 중반 중국이 서남쪽의 윈난(雲南) 지역을 영역화했다. 이로부터 아열대 약초인 ‘첨등(甛橙)’도 ‘전남본초(滇南本草)’에 수록됐다. 이후 더욱 새로운 종들이 출현한다. 16세기 후반 리쓰쩐(李時珍)은 “대부분의 감귤은 접목해 키우는데 오직 종자로서 자란 것이 약효는 더욱 좋다(多是接成, 惟種成者, 氣味尤勝)”고 했다. 우리나라의 17세기 편찬 ‘탐라지’를 보면, 감귤모양의 열매가 중국보다 덜 다양하고 맛도 떨어졌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약효는 제주 자생귤이 더 좋았을 듯 싶다.

18세기부터 첨등(오렌지)과 유자의 자연교잡으로서 ‘자몽’도 나왔다. 유럽은 1805년 중국산 감귤 재배가 시작됐으며, 일본산 감귤은 1878년부터 사쯔마(Satsuma)라고 불렸다. 일본에서는 인위교잡으로 20세기 초반 흥진(興津)온주, 20세기 후반 들어와 잡감에 속하는 청견, 한라봉, 천혜향 등도 생성해냈다. 이들 분화는 이식 후의 자연교잡, 돌연변이, 인위교잡 등으로 이뤄졌다. 이는 과학기술의 진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들 경우가 2차적 분화에 들어간다.

결국, 감귤모양의 열매는 1차·2차적 분화의 결과로서 종류가 현재 수천 종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