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천천히 가자
2015, 천천히 가자
  • 정흥남 논설실장
  • 승인 2015.12.2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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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일 남았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 모두 올 한해 각자의 아쉬움과 새해에 대한 바람을 가슴에 품고 지금 이 순간을 건너고 있다. 올 한해 여느 해 보다 ‘느림의 미학’ 이라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미학이라는 개념은 예술론에 포함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는 ‘느림의 미학’이라는 개념이 우리 생활 깊이 파고들었다. 바쁜 현대인들의 삶을 조금 느리게 여유 있게 자연과 함께 살아보자는 생활방식이다.

더욱 연말에는 남아 있는 그 짧은 시간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과 발걸음을 바쁘게 만들면서 이 ‘느림이 미학’이 절실하게 파고든다. 뭐든지 부지런히 준비하고 살뜰히 주위를 챙길 줄 아는 사람일수록 서두루지 않는다.

마음에도 걸음에도 여유가 있다. 그러고 보면 느림이란,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삶이 기쁨인 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이 일수록 오랜 시간이, 느긋하게 기다리는 느림의 미덕이 들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같은 이치를 잘 알면서도 정작 자신의 앞에 닥친 상황을 접하곤 곧잘 바쁨 속으로 내달린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삶이 그만큼 팍팍해진 때문이라는게 솔직한 표현일 수 있다.

2015년 제주사회를 대표할 화두는 또 ‘갈등’ 이다. 지난 10년 가까이 제주사회를 억눌러 온 강정해군기지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이번에는 제2공항 문제로 또 갈등이 시작됐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자신들도 모르는 새 공항지역으로 지정됐고, 또 그 터전을 떠나야 한다면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주사회에 또 하나의 거대갈등이 발생했고, 그 갈등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강정해군기지 건설에서 보았듯 제주사회는 갈등해결에 한없이 취약하다. 제주가 과거로 퇴행하지 않는 한 미래 항공수요를 위한 공항시설확충은 필수적이다. 이 문제로 제주사회가 또다시 멈칫거린다면 제주가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군가는 나서 이 문제를 풀기위한 중재라도 해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이 조차 없어 보인다. 때마침 오늘은 성탄절이다.

2000여년전 어느 영광스러운 밤에 신이 인간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 그날이다. 체념과 절망에 빠진, 갈등과 분노가 들끓는 우리사회에도 그같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파를 초월해 모두가 이날을 찬양하는 것이다. 가던 길 멈추고 각자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 나 아닌 너를 헤아리려는 여유가 꼭 필요한 시간이다.

2015년 KBO리그에서 두각을 보인 선수 가운데 한명이 유희관이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류현진 투수(LA다저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화 시절 KBO리그 한 시즌 18승으로 신인왕, MVP를 모두 차지했다. 그런데 유희관 투수(두산 베어스)를 제대로 기억하는 일반인은 그리 많지 않다. 유희관은 올 KBO리그서 18승을 챙겼다. NC 다이노스의 외국인 투수 에릭 해커(19승)에 이어 다승 2위를 차지했다.

유희관의 최고 구속은 130km/h대 중반이다. 프로세계에서 이만한 구속은 쑥스러운 수준의 볼 빠름이다. 그러나 유희관의 최저 구속은 무려 70km/h 대다. 빠른 볼에 익숙해진 타자들이 유희관 앞에서 맥을 못 출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는 빠른 볼 보다는 정밀한 제구력(그것도 초 슬로볼을 곁들인)으로 경쟁해 타자들을 울렸다. 느림이 빠름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유희관이 증명해낸 셈이다.

느림은 되돌아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들은 당당함을 잃으면 눈앞 사사로움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모든 코드를 거기에 맞추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망각한다. 새해엔 모두 느림의 미덕을 쫓아 보자. 시간에 역행하지도 말고, 건너뛰지도 말고, 시간과 함께 익어가는 여유를 아는 사람으로 나가 보자. 그러다 보면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도 자연스럽게 풀 수 있다. 혹 건너지 못할 벽이라도 생긴다면 더욱 천천히 처음으로 돌아가자.

정흥남 논설실장  jhn@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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