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情과 恨 풀어내던 ‘칠성통’서 문예 향기를 피우다
시대의 情과 恨 풀어내던 ‘칠성통’서 문예 향기를 피우다
  • 고현영 기자
  • 승인 2017.01.31 18: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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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성당~관덕정~칠성로 ‘다방길’ 문화1번지 각광
교양종합지 '신문화'(1952) 창간에 참여한 시인 양중해(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와 1950년대 민주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던 양용해씨(왼쪽에서 세 번째)

“무엇인가 외쳐서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목소리를 이제는 지면에 새기는 작업을 해야 할 때다."

20대의 패기 넘치던 청춘들은 어느새 백발이 성성해져 아흔을 바라보고 있다. 영원히 함께 있을 것만 같았던 동무들도 하나 둘 세상과 하직하고 이제 곁에 남은 지기들의 수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세월은 그렇게 속절 없이 흘러 2017년이 됐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주의 대표 번화가는 단연 칠성통(현 칠성로) 이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흐름이 이곳에서 집약됐을 정도로 제주 근대사의 요새였다.

특히 지금의 중앙성당~관덕정~칠성로로 이어진 ‘다방길’은 제주 문예부흥의 산파 역할을 했다. 당시 다방은 따끈따끈한 새 소식을 나누는 사랑방이기도 했지만 뜻 맞는 문학동호인들의 토론장이자, 그 시대의 정(情)과 한(恨)을 풀어낼 수 있는 안식처요, 유일무이한 ‘소통 공간’이었다.

1947년 10월, 제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칠성다방’을 필두로 1950년대 동백·남궁·무지개·청탑다방 등은 불운의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예술인들을 엮어 놓은 ‘문화1번지’였다.

소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소설가 계용묵(왼쪽에서 세 번째 앉은 이)은 1951년 1·4 후퇴 직후부터 1954년 6월까지 제주에 머물면서 제주 문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제주에서 지냈던 3년여의 시간 중 대부분을 '동백다방'에서 도내 문인들과 공유하며 '흑산호'(1953)를 창간했다.

소설 ‘백치 아다다’로 유명한 계용묵(1904~1961) 역시 1951년 피난민 행렬 속에 입도해 제주를 떠나는 1954년까지 3년여의 시간 중 대부분을 ‘동백다방’에서 도내 문인들과 공유하며 ‘흑산호’(1953)를 창간했고 중·고생 중심으로 조직된 모임인 ‘별무리’ 등 문학청년들을 지도했다.

계용묵과 함께 교양종합지 ‘신문화’(1952) 창간에 참여한 시인 양중해(1927~2007)에게도 동백다방은 문학 청년의 열정을 토로해내는 창구 역할로써 충분했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오~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어이하리, 날 바닷가에 홀로 남겨 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로 시작하는 양중해 시인의 ‘떠나가는 배’도 이 시기인 1952년에 지어졌다.

‘떠나가는 배’는 애틋하고 뭉클한 두 연인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탄생됐다. 당시 유부남이던 박목월 시인(1915~1978)은 정을 나눈 여대생과 이곳 제주로 도피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여대생의 아버지는 물어 물어 제주로 찾아왔고 강제로 딸을 부산행 배에 태웠다. 사랑하는 여인이 탄 배가 점점 멀어져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항구에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박목월의 당시 마음을 가슴 아프게 지켜본 친구, 양중해가 두 연인의 애절함을 가사에 담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1950년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발간·창간됐던 동인지들 중에는 ‘비자림’(1958)·‘문주란’(1959)·‘시작업’(1959) 등이 있다.

비단 다방은 문학 분야의 근거지만은 아니었다. 미술인들이 그동안 자신과의 싸움으로 얻어낸 결실을 소위 관객들과 교류가 가능하게 하는 전시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학한 제주 출신 서양화가 조영호는 1954년 9월 오아시스다방에서 개인전을 열며 다방 전시의 물꼬를 텄다. 그간 관덕정 등에 국한해서 개최됐던 미술 전시를 차와 이야기가 있는 다방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초가 된 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동백다방에서 강태석 전시가 열려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사진 분야에서도 다방 전시의 첫 시도가 있었다. 1955년 칠성로 남궁다방에서 열린 고영일·부종휴의 공동사진전이 그것이다. 이들은 주로 풍경과 산·식물 사진을 내걸며 사진예술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이처럼 1950년대에 다방은 땅거미가 질 무렵 삼삼오오 모여 앉아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던 쉼터이자, 약속할 곳 변변찮았던 그 시절 만남의 장소였다. 정 붙일 곳 마땅하지 않았던 피난민들에게는 휴식처였고, 또 정치인들에겐 나라의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어느 직장인에겐 사무실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물질이 풍족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공감’ 하나만으로 ‘공동체’를 엮을 수 있을 정도로 ‘정(情)’ 만큼은 풍부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여유와 멋의 상징이 된 커피 한 잔. 제주의 문예부흥을 이끈 ‘공간’으로서의 ‘다방’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제1회 제주도미술협회전(1955년)을 마친 후 찍은 기념촬영 사진

 

고현영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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