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해를 여는 곳서 성산포가 된 사내를 마주하다
날마다 새해를 여는 곳서 성산포가 된 사내를 마주하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1.30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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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의 올레이야기-4. 올레 제1코스(시흥~광치기) -성산갑문~광치기 해변(4.1㎞)
제주 올레길 1코스에 있는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비공원.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통해 성산포를 널리 알린 이생진 시인의 공로를 인정해 2009년 성산리마을회에 의해 조성됐다.

[제주일보] #탐라순력도 ‘성산관일’을 떠올리며

성산갑문을 지나 네거리에서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면, 왼쪽에 ‘성산일출봉의 떠오르는 태양’을 상징적으로 살렸다는 성산초등학교의 멋진 정문이 나온다.

해방을 맞아 앞서 일본인들의 자녀를 교육했던 심상소학교 자리에서 개교한 후 이런저런 이유로 세 번째로 옮긴 학교교정이다. 울타리에는 동백나무와 까마귀쪽나무, 돈나무, 후박나무 같은 상록수가 늘어섰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문득 ‘성산관일(城山觀日)’이 떠오른다.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가 순력할 때 그린 그림 ‘탐라순력도’의 ‘성산관일’에는 민가는 없고 한복판에 봉천수만 덩그마니 그려놓았다. 그와는 달리 목사가 오름 정상 성산망 옆에 앉아 해 뜨는 광경을 보고 있는 모습이 아련하다. 오름 바로 밑은 진해당(鎭海堂) 옛터라고 했고, 등산길은 돌을 깎아 계단을 만들고 곳곳에 목책도 그려 놓았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조금 걸으면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비공원이 있다.

2009년 이생진 시인의 성산포 관련 시를 모아 성산리마을회에서 조성해 놓은 곳이다.

이생진 시인은 1978년 바다와 섬과 고독 등을 노래한 시를 묶어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냈는데, 이것이 성산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돼 그 공로로 2001년 명예도민이 됐다고 한다. 시비들은 박경훈, 라해문 디자인으로 ‘술에 취한 바다’ 등 여러 구절을 새겼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60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부분.

 

#세계자연유산 ‘성산일출봉’

성산일출봉은 약 5000년 전 현무암질 마그마가 얕은 바다 밑에서 분출하며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화산퇴적물이 화구 주변에 쌓여 뚜렷한 층리를 이뤘고, 가파른 경사면을 가진 응회구가 만들어진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태풍과 하늬바람이 일으키는 파도에 의해 빠른 침식을 가져와 오늘의 형태를 이룬 것이다.

전체가 정상으로 큰 분화구를 형성했고 분화구 둘레에 99개의 기암이 절경을 이룬다.

본래 이름은 기암이 성처럼 생겼다고 ‘성산(城山)’이다. 그러던 것이 일출로 이름이 나면서 ‘일출봉’이 덧붙은 것이다. 이곳은 영주십경의 제일경 ‘성산출일(城山出日)’로 시작해 독특한 환경과 식생으로 1976년에 제주도기념물, 2000년에 천연기념물 제420호로 지정됐고, 응회구가 지형을 잘 간직함과 동시에 해안절벽을 따라 다양한 내부구조를 훌륭히 보여주고 있대서 2007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됐다.

 

수마포 해변 인근 일제 진지동굴

#수마포 일제 진지동굴과 응회암

성산일출봉을 넘어서면 바로 수마포 해변, 조선시대 진상하는 말을 받아갔다는 포구다.

지금은 근래 개설된 지질 트레일 코스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일출봉의 서측 절벽을 따라가면 일본군이 파 놓은 진지동굴들을 만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섬의 해안선을 따라 급하게 파놓은 진지동굴들은 대부분 이런 응회암에 있다. 수월봉, 송악산, 삼매봉 등은 이곳처럼 비교적 파기 쉬운 지질이다.

일출봉 해안에는 모두 18곳의 동굴진지가 확인됐는데, 총 길이가 514m로 제주도내 특공기지 가운데 가장 긴 규모이다. 2006년 1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11호로 지정됐다.

이곳의 해안선에서는 성산일출봉의 응회암과 신양리층의 부정합면도 관찰할 수 있다. 해안선 일출봉의 응회암을 스코리아 퇴적층인 신양리층이 덮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아 신양리층은 성산일출봉이 형성돼 현재의 모습을 갖춘 후에 퇴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4·3의 아픔을 간직한 곳, 터진목

다시 해안선을 따라 걸어가면 성산일출봉이 제일 잘 보이는 곳, 터진목에 이른다. 물이 나가면 앞에 나지막한 여가 나타나는데, 그게 광치기여다. 지금은 해변에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제주4·3 성산읍 희생자 위령비를 세워 희생자 명단과 추모의 글을 새겨 놓았다. 입구에 세워진 ‘제주4·3유적지(터진목)’ 표지석에는 ‘성산일출봉이 불쑥 솟아올라 제주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이곳, 터진목은 4·3 당시 성산면 주민들이 끌려와 학살당한 한과 눈물의 땅이다. 성산리는 4·3 당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서청특별중대의 존재는 지역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라고 새기고 있다.

당시 성산국민학교에는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편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바로 앞 주정공장 창고에는 갖가지 구실로 붙잡혀 온 주민들로 가득했다. 군인들은 끌려온 주민들에게 온갖 폭행과 고문을 가했고, 이들 대부분이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이외에도 인근 구좌면 세화·하도·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긴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의 의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6·25 한국전쟁 당시 상부의 예비검속 명령을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란 이유로 거부해 많은 주민의 목숨을 살렸다. 필자도 이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연작소설 ‘섬에 태어난 죄’의 ‘생사(生死)’편을 쓴 기억이 새롭다. 소설 속의 장면을 떠올리며 1코스 종착점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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