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귤, 고려 때 고관대작도 맛보기 어려운 과일
제주 감귤, 고려 때 고관대작도 맛보기 어려운 과일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1.25 18: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8>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7)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는 13세기 전반부터 이미 ‘귤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내력은 어떠했을까.

제주는 감귤재배가 1052년 이전, 곧 1000여 년 전부터는 항상적으로 이뤄졌음이 확인된다. 이후 200여 년이 지난 13세기 전반 무렵에도 제주 감귤은 희소가치가 컸다. 이는 다음의 시 두 편에서 알 수 있다.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 귀인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 해마다 늙은 사람 생각해 줌이 고맙네…/ 선생이 바뀌어 강회(江淮)를 건너오면/ 다시는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내주겠는고/ 이 과일 맛보기 어려운 것은 정말 작은 일이라/ 그대가 곧 성랑(省郞)으로 승진되어 돌아올 일 축하하네.”

“더운 지방에 몸조심 잘한 일 가장 반가워/ 하물며 중서성(中書省)의 새 벼슬 받으심에(우정언(右正言)으로 불려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지난날 내가 보낸 시 들어맞지 않습니까/ 그대는 이미 중서성을 향했구려(나의 먼젓번 시에 ‘그대에게 비노니 모름지기 중서성의 낭관(郎官)이 되어 돌아오라’ 했다)/ 은근한 정 머금은 청귤(靑橘) 바다를 건너왔으니/ 먹는 데 중요해서가 아니라 멀리 온 것이 기특하네(썩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2월 제 고향 떠나 이제 도착했는데도/ 사랑스럽구나 그윽한 향기 아직도 감도네(아직 상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이들 시는 이규보가 지었거니와,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쓰인 수많은 제주 감귤 예찬의 시문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앞의 시는 모두 이규보가 제주수령 최자에게 보낸 것이다. 이규보는 당대의 대문호이자 조정(朝庭) 실력자였고, 최자는 1234년(고종 21) 무렵 제주수령을 지내고 있었다. 그동안 최자는 감귤을 매해 이규보에게 보냈다. 그래서 이규보가 고마워 최자의 승진 소식을 미리 알려 축하하며, 다시 만날 걸 바라면서 시를 써 부쳤던 것이다.

시에서 보듯이 귤은 제주에서만 났고 매우 귀해 중앙의 최고 상류층도 구하기가 힘든 과일이었다. 특히 청귤이 제주에서 이미 산출되고 있었음과 아울러 향기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제주에서 개경으로 가는 동안 시일이 많이 걸려 부패해진 귤도 많았다고 한다.

일찍이 최자는 ‘능력 없는 관료’로 당시의 최고 권력자 최우에게 찍혀 10여 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 이규보가 최자를 적극적으로 최우에게 추천함으로써 관직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이규보가 제주에 가 있던 최자에게 인사 내용을 미리 귀띔하는 등 계속 알게 모르게 후원해줬던 것이다. 최자는 제주수령을 지내고 난 뒤 24년이 지난 1258년(고종 45) 수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결국 최자는 제주수령으로 부임하자 제주에서만 나는 터라 상당히 귀해 최고 상류층도 맛보기 힘든 귤을 조정의 실력자이고, 자신을 다시 관직의 길로 이끌어 준 이규보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하겠다. 이는 그동안의 일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아울러 호의를 사 앞날의 후원도 기대한데서 비롯했을 것이다. 아마도 최자가 수상까지 이른 데는 이규보의 도움도 많이 받았을 듯싶다.

한편 제주는 1260년(원종 1) 이전부터 중국 남송(南宋)의 상인과 일본의 왜(倭)가 아무 때나 자주 오고갔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 무렵 남송 상인의 경우는 닝보(寧波)로부터 동북쪽으로 항해해 제주 서남부 쪽의 해로를 거쳐 흑산도로 나아간 뒤 군산도(조선시대 말까지 섬)에 다다르고, 이어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태안반도에 이른 다음, 강화도를 거쳐 예성강 하류에 위치한 해외무역선의 최종 정박지 벽란도, 곧 ‘예성항’에 도착하는 바닷길을 활발하게 이용했다. 그런 만큼, 남송 상인이 제주를 중간 기착지로 삼고 자주 드나들게 됐을 것이다. 이때 중국의 동정귤(洞庭橘)도 제주로 유입됐을 듯싶다. 이는 남송 상인이 닝보로부터 출항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닝보는 타이후(太湖) 내 둥팅산(洞庭山)에서 나는 동정귤과 아울러 그 귤피(橘皮)·진피(陳皮)와 같은 약재류가 해외로 나갈 때 최적의 지리적 여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안 해저 유물선이 1323년(충숙왕 10) 닝보에서 출항했고 이 선내에서 진피의 목간(木簡), 곧 배송증도 발견됐던 사실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다음에도 13세기 후반 무렵 동정귤의 제주 유입 관련 사실과 함께, ‘귤의 고장’이라 일컫게 제주의 내력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제주 동정귤-광령리 귤나무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동의보감 등 사서 속 제주 동정귤-중국산과 맛·색깔 등 차별성 존재

‘동의보감’에 나온 ‘동정귤’의 형상과 특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고, 중국과 제주의 동정귤을 비교해보자.

중국 경우 1061년 발간된 ‘본초도경(本草圖經)’에 “나무높이는 약 3~6m, 잎은 ‘枳’(지각)의 잎과 구별이 어렵고 가시가 줄기 사이에 난다. 초여름 흰 꽃이 피며 음력 6~7월에 열매 맺고 겨울에 노랗게 익으니, 먹을 수 있고 시월에 수확한다(木高一二丈, 葉與枳無辨, 刺出於莖間, 夏初生白花, 六月七月而成實, 至冬而黃熟, 乃可噉…十月採)”라 했다.

허준은 이를 ‘동의보감’에 거의 그대로 옮겼고 “우리나라에는 오직 제주에 난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로써 송대(宋代)의 동정귤이 제주로 이식됐음도 엿볼 수 있다.

또한 정쎼(鄭獬, 1022~1072)는 “열매는 붉은 금빛이고 지름은 3㎝ 정도며 둥글다(赤金三寸圓)”라고 했다. 1178년 나온 ‘귤보(橘譜)’에는 “맛은 좋다…최고로 일찍 익으며 저장하면 다음해 봄까지 간다(味美...熟最早, 藏之至來歲之春)”는 내용도 나온다. 1977년 간행된 ‘중약대사전’에는 “잎은 타원형으로 길이가 9㎝ 너비가 4㎝로 양끝이 점차 뾰족해지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거나 물결 모양의 톱니가 있다. 앞면은 짙은 녹색이고 뒷면은 연한 녹색이다. 잎자루에 날개가 선처럼 가늘고 길다”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서의 경우는 “열매의 지름은 3㎝ 정도, 껍질은 얇고 과육은 신맛이 단맛보다 강하지만 상쾌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색깔이 푸른빛이 도는 노란색을 띤다고 하는 것으로 봐, 붉은 색을 띠는 중국의 주귤(朱橘)과는 차이가 있다. 곧, 중국·한국산의 동정귤은 각각 차별성도 있었다고 하겠다. 반면, ‘탐라직방설’(1819)에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신맛이 강하다(酸不堪食)”라고도 했다. 아마도, 이는 조선 후기 감귤 재배기술의 저급화됨에 따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김정희의 ‘완당전집’(1849)을 보면 “고씨 집안 과수원에 두 그루, 관청에 한 그루가 있다(高家私園只二樹, 官園只一樹)”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 나무가 현재 광령리에 있는 수령 300년 동정귤나무가 아닌지? 최근 제주도 농업기술원에서 나온 자료에는 ‘진귤’이 자생종이라 했다. 이는 중국 주귤과 유전자의 비교 분석이 이뤄져야 할 일이며,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고 하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