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물 '한정판', 物性보다 알맹이가 귀함이니"
"숨겨진 보물 '한정판', 物性보다 알맹이가 귀함이니"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1.1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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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웅의 책 이야기…한정판(限定版)
100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김해성(金海星)의 ‘한국불교시연구(韓國佛敎詩硏究)’(형설출판사, 1979)

[제주일보] 얼마 전 서울 출장을 갔다가 자주 가는 헌책방에 들렀다. 많은 책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서가 여기저기에 똑 같은 책들이 많이 보이는 게…. 아마도 출판사에서 재고로 가지고 있다가 처리한 책인 듯 싶었다. 혹시나 해서 그 가운데 한 권을 꺼내어 살펴보니 100부 ‘한정판(限定版)’이 아닌가. 이런 횡재가….

한정판이란 일정한 수량만큼만 찍어 내는 책이나 음반을 말한다. 일정한 수량만 찍었으니 다른 책들에 비해 유통량이 적은 것은 당연하고 그로 인해 희소성이 높으니 태생적으로 그 책을 찾는 독자들에게 사랑 받을 수 밖에 없는 귀하신 몸이다.

몇 해 전에 한 경매에서 7000만원에 낙찰돼 인구에 회자된 시인 백석(白石)의 시집 ‘사슴’(선광인쇄주식회사, 1936)도 100부 한정판이었다. 당시 간행 후 평판이 좋아서 그 시집을 소장하고 싶어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발행량이 출판 당시로서도 적은 부수라서 시인 윤동주(尹東柱)도 이 책을 구할 수 없자 직접 필사해서 읽을 정도로 희귀본이었다. 물론 한정판이라고 모두 다 금전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그 책을 사랑하는 ‘팬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700부만 출판된 중국 청나라 때의 관찬 지리지 ‘가경중수일통지(嘉慶重修一統志)’ (中華書局,1986) 전 35권 중 제1권

십수년 전의 이야기지만 중국에 있을 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새로 출판된 관심분야 책은 서점에서 발견 즉시 사라’, ‘출판량이 몇 백 부 단위인 책은 가능하면 장르를 불문하고 사라’였다. 당시 중국에서 인문학 서적 초판의 출판부수는 보통 1000부 정도였고 웬만해서는 재판을 안 찍는 분위기였다.

어지간한 나라 규모의 성급(省級) 행정구역을 31개나 가진 중국에서 1000권이면 한 개 성에 33권도 배정이 안되는 셈이고 초판 발행 후 재판이 없으니 한정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새 책이라도 눈에 띄었을 때 사두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더구나 출판량이 몇 백 부 단위인 책들은 희소성이 높기 때문에 장르에 관계 없이 소장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한정판 중에는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나누려고 일부러 조금만 만든 책도 있고 그 중에는 순수하게 금전적인 압박으로 인해 조금만 찍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은 이런저런 사연보다는 상업적인 마케팅을 목적으로 한정판이 출판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소수만을 위한 한정판으로 만들어 책의 희소성을 미끼로 더 높은 가격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한정판의 묘미는 그 책의 경제적 가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열정적인 수집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집 대상물의 금전적 가치 때문에 모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집을 즐기며 모으다 보니 결과적으로 높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경우는 많이 있어도….

지금도 헌책방을 순례하다 보면 종종 독자들에게 잊혀진 작가들의 한정판 책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만나게 되는 한정판은 경제적 가치의 유무를 떠나서 수집가에겐 큰 기쁨이 된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가 없어서 많은 사람에게서 사랑 받지는 못할지라도.

이 글을 쓰다 보니, 언젠가 서울 용산역 옆 한 헌책방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요즘 사람들은 책의 알맹이(내용)보다 책의 물성(物性)에 더 관심을 갖는 게 아쉽다.”

그 때는 그 분과 함께 아쉬워 했었는데, 지금 내 모습은 왠지 낯설다. ‘내가 이러려고 헌책방을 했나….’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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