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눈에 담은 알오름 내려와 푸른 바다 마을 종달리로
한라산 눈에 담은 알오름 내려와 푸른 바다 마을 종달리로
  • 뉴제주일보
  • 승인 2017.01.09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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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집의 올레이야기-2. 올레 제1코스(시흥~광치기) -알오름 정상~목화휴게소(5.2㎞)
제주 올레길 1코스에 있는 종달리 바다. 바닷물이 빠진 모래밭 뒤로 우도가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오조리로 이어진 바다는 유달리 조개가 많아 여름이면 조개잡이 체험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주일보] #한라산을 바라보며

과거 목장지대에 위치한 오름에 불을 넣을 당시는 대부분 풀밭이었는데, 요즘 오름에 나무가 우거지다 보니 조망권이 아예 없거나 사방을 둘러보는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알오름에선 사방이 환히 트여 있어 주변 오름이며, 섬, 마을과 벌판까지 시원스레 볼 수 있다. 그 중에 아득히 보이는 한라산이 오늘 따라 더욱 품위 있게 다가온다. 바다 속에서 떠오른 제주섬의 시작이 한라산 분화구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산이 섬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이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 제일 멋있을까?’라고 물어 보면, 제주에서 낳고 자란 이들은 십중팔구 자신의 고향에서 보는 한라산의 모습을 내세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 제일 처음 본 산의 모습이고 자라면서 천천히 뇌리에 새겨진 모습이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 한라산을 대했을 때는 어색한 느낌까지 들기 마련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 섬을 돌며 제주의 상징인 한라산의 모습을 살펴보는 즐거움도 올레길의 한 가지 매력이 될 것이다.

 

#종달리로 가는 길

‘천천히 즐기며 가라’고 ‘간세’라고 했겠지만 사실은 ‘놀멍놀멍(천천히)’ 가라는 뜻일 게다. 그렇다고 ‘허천바레’거나 ‘세경바레여서(한눈팔아서)’는 ‘부더질(넘어질)’ 터이니까. 천천히 조망을 즐기고 나서 정상 바로 밑 나무가 우거진 오래된 무덤의 동자석에 눈을 맞추고 내려간다. 길고 완만한 벌판은 이제 누런빛으로 변해버렸다. 봄이면 양지꽃으로 시작해 가을 쥐손이풀, 이질풀 등 들꽃으로 가득했던 곳이다.

농로를 따라 밭에 심어 놓은 작물들을 바라보며 종달리 삼거리에 막 들어서기 전,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가 한참을 걸어 용눈이오름로로 나온다. 잠시 차나 한 잔 할 요량으로 찻집에 들렀는데, 커피 맛보다는 싱싱한 당근즙이 일품이다. 구좌읍의 자랑인 당근을 이용해 짜낸 것이다.

이처럼 올레길을 걷다보면, 그 지역 특산 식품을 대할 수 있어 좋다. 그곳에서 나오면 바로 1132번 일주도로와 만나는 종달교차로이다.

 

#바다가 아름다운 마을 종달리

‘제주의 마을’ 종달리 홈페이지에 가면, ‘바다가 아름다운 마을 종달리’라는 표제를 달고 ‘한라산을 등진 삼백예순여덟 개의 오름들이 이어져 오다가 마침내 그 헤아림을 멈춘 지미봉이 있는 마을. 최근에 삼국시대의 유적이 발견되면서는 역사의 고장으로, 갈대숲에서 물꿩과 남방개 그리고 용눈이오름에서 피어나는 향유화가 관찰되면서는 학술의 고장으로, 지미봉의 일출과 체험어장의 맛조개잡이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도로가 소개되면서는 체험의 고장으로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마을’이라고 소개해 놓았다.

오래된 나무 사이로 보이는 종달초등학교 옆을 지나 골목길을 걸으며, 이 마을 이름에 대해 생각해본다. 종달리(終達里)는 한자의 뜻과 마을 옆의 지미봉(地尾峰)과 연관 지을 때는 ‘제주목의 동쪽 끝 마을’이란 해석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뚜렷한 근거가 없으며 19세기 중반까지는 정의현 좌면에 속했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주군 좌면에 속하게 된 마을이다.

하기야 종점에 이르는 곳에서 돌아서면 시작점이 된다는 이치를 알고 보면 부디 따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을 터다. 올레길이 1코스로 시작해 마지막 21코스의 종착점이 바로 종달리로 삼은 것은 참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갈대밭으로 변한 종달리 엣 소금밭

#종달리 옛 소금밭

한때 종달리 사람들을 ‘소금바치’라 부를 만큼 이곳 염전은 유명했었다.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따르면, ‘1573년 강려(姜侶) 목사가 이곳 해안 모래판을 염전 적지로 지목하고 마을 유지를 파견해 제염술을 전수해다 새로운 형태의 소금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20세기 초 종달리는 353가호의 주민이 살았는데 그 중 제염에 종사하는 사람이 160여 명에 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釜)를 46개나 걸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마을 홈페이지에는 ‘염전으로 이용되던 간석지(干潟地)가 해방 후 교통이 발달되어 육지부의 소금이 들여오면서 1957년부터 근 12년 동안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여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쌀값이 폭락하면서 논은 경작하지 않게 됐고 그 때문에 땅이 내버려져 지금은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나머지는 갈대밭으로 변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해안도로에 막 접어들었을 때, 조그만 습지에 철새 몇 마리가 앉아 AI의 걱정도 없이 한가로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개잡이 체험장 종달리 바다

해안도로 밖으로 펼쳐진 모래밭을 바라보니 문득 종달리사무소에 걸려있던 양전형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조개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네/ 훈풍이 쓰다듬고 뭇 사내들 다가와도/ 종달리 세월만 껍데기에 새긴다네/ 바닷길 떠나 도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조개는 눈물 젖은 모래밭에 웅크려 앉아/ 한가슴 가득한 그리움 속살에다 키운다네’ 시 ‘종달리 절개’의 일절이다.

이곳에서 오조리로 이어진 바다는 유달리 조개가 많아 여름이면 조개잡이 체험장으로 알려졌다. 썰물이 돼 바닷물이 밀려가고 나면 모래밭에서 조개를 잡는데 구멍이 터지면 맛소금을 넣어 맛조개를 잡는다. 입장 및 채취는 무료이나 체험에 따르는 여러 장비들은 유료로 대여하고 있다. 재작년 이곳에서 방송촬영을 했는데, 조개가 많아서인지 갈매기와 커다란 왜가리까지 많이 날아든 것을 보며 ‘어부지리(漁父之利)’의 고사를 떠올린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물이 많이 들어와 있어 모래밭은 드러나지 않았다. <계속>

<김창집 본사 객원 大기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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