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귤재배 1000년의 역사'…고려 때부터 '귤의 고장'
제주 감귤재배 1000년의 역사'…고려 때부터 '귤의 고장'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2.2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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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7>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6)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는 감귤류 나무가 선사시대부터 자라날 수 있는 자연환경적 여건을 갖춘 지역이다.

이때 제주에 처음 들어온 감귤류 나무는 한참 동안 자생종이라 하겠다. 이후 이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제주사람에 의해 관리·개량되는 과정을 거치거나, 혹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감귤류 나무의 종자가 들어와 식용작물로 재배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럼, 제주의 감귤재배가 언제부터 일상적으로 이뤄졌을까.

제주사람이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가 명백히 확인되는 것은 1000여 년 전부터이다.

참고로 중국의 경우를 보면 감귤재배가 기원전 100년 이전부터, 그것도 상업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기원전 91년에 편찬한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을 보면, ‘쓰촨(蜀)·산시(漢)·장링(江陵)과 같은 지역에서 귤나무 1000그루를 가꾼다면, 그 수입이 모두 1000호를 가진 제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벼슬이 없더라도 처사(處士)의 의리를 지키면서도 부를 누린다’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제주의 감귤재배도 2000여 년이나 1500여 년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논의가 있기는 하다. 이들 논의는 일본의 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서기 70년 충신이 상세국(常世國)으로부터 귤을 얻어 가 천황에게 바쳤다는 내용과 아울러, 일본 야사에 해당하는 ‘비후국사(肥後國史)’에 삼한에서 귤을 들여왔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음을 근거로 든다. 또한 이들 기록에 나오는 귤의 원래 출산지를 제주로도 본다. 이로써 감귤나무가 제주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를 4세기 이전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한 제주지역의 ‘방물(方物)’, 곧 토산품이 476년 삼국시대의 백제에 바쳐진 이래 통일신라와 일본 및 고려와의 관계 형성에 따라 이용됐음도 각종 사서에 나온다. 이때 이들 제주지역의 물품은 일괄적으로 방물이라 할 뿐, 품목을 일일이 거론치 않고 있다. 귤이 5세기 후반 이후 제주지역의 방물 가운데 들어가는지 여부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귤의 경우도 제주의 방물로 간주됐다고 보곤 한다.

이로써 제주사람의 감귤재배도 5세기 후반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물론 제주의 감귤이 5세기 후반 이전부터 제주의 방물로 간주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감귤이 제주의 토산물로 정착된 이후의 선입관이 빚어낸 추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곧, 감귤이 제주의 토산물로 자리잡기 이전부터 사서 기록에 나오는 제주 ‘방물’에도 감귤이 포함됐다고 보는 오류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제주의 감귤재배가 1000여 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봄은 확실하다.

‘고려사’를 보면 1052년(문종 5)에 제주의 토산물로 중앙정부에 매해 바치던 귤의 납부량을 100‘包子’(포자·보자기, 상자?)로 개정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은 귤 관련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졌거니와, 제주의 감귤재배가 거의 1000여 년 전부터 이미 시작됐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제주의 귤이 세금의 형태로 매해 중앙정부에 납부했다함은 제주사람의 감귤재배가 항상적으로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1052년 귤의 납부량이 조정됐다함은 그 이전부터 이미 제주의 귤이 중앙정부에 매해 상납됐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가 ‘귤의 고장’이라 일컬어지기 시작한 것도 고려 때부터였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의 감귤재배가 왕성해져 나아가 제주 경관에 감귤나무가 얹힌 것에 비롯된 바가 컸다.

한편 신안 해저 유물선은 1323년(고려 충숙왕 10) 오늘날의 저쟝성 닝보(浙江省 寧波)를 떠나 일본 하카타(博多)로 향하다가 전남 신안군 앞바다 해역에 침몰한 무역선이었다. 여기에서는 300여 점의 목간(木簡), 곧 나무조각에 글을 써 하물에 붙인 배송증도 발견됐다. 그 중 하나가 ‘陳皮卅七斤正悟α’(진피37근정오α)라 쓰인 목간이다. 이는 진피 37근을 넣은 하물을 정오라는 곳, 혹은 사람에게 보낸다면서 배송자의 서명(α)을 표기한 배송증이라 할 수 있다. 진피, 곧 귤껍질을 말려서 오랫동안 묵힌 것은 14세기 전반 이전부터 국제적 교역품으로 수출·수입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는 진피의 약리적 효과가 뛰어나고, 그것이 국제적 명성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제주가 ‘귤의 고장’이라 일컬어진 데는 진피 등을 주고받는 국제적 교류에도 영향을 받았을 듯싶다. 이것과도 결부된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감귤나무 학명(Citrus reticulata Blanco) - 스페인 식물학자가 정의…용어는 중국으로부터 기원

감귤나무의 학명은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를 한번 살펴보자.

죽 이야기해 왔듯이, 감귤은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해 분류가 쉽지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명(scientific name)의 세분화가 필요하다.

감귤나무는 학명으로 ‘Citrus reticulata Blanco’라 한다. 여기에는 유전학적으로 계보를 같이하는 온갖 감귤나무류(類)가 있다.

곧, ‘Citrus reticulata Blanco’라고 함은 Blanco라는 스페인 식물학자가 감귤나무(Mandarin)류를 Citrus속(屬)의 reticulata종(種)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뜻밖에 이들 학명의 용어는 중국으로부터 기원했다. 기원전 중국의 기록인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篇)에 상하기 쉬운 “귤유(橘柚)는 싸서(包) 바치라(厥包橘柚)”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귤유 곧, 감귤속(柑橘屬)에 해당하는 달고, 또한 신 과일(산물·酸物)들이 희랍(Greece)으로 건네지고, 그 산물들이 상자(箱子)로 유통됐다. 희랍에서 상자는 희랍어로 ‘kitron’으로 불렸거니와, 그 kitron이라는 말에서 매우 신 과일을 뜻하는 citron이 나오고, 그 부류를 의미하는 citrus가 생겨난 것이다. 이로써 Citrus란 용어가 애초에는 중국의 포(包)에서 유래됐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감귤껍질의 무늬형상을 ‘귤피문세(橘皮紋細)’라 했다. 이는 껍질문양이 촘촘한 그물 같다는 것이며, ‘retic ulata’는 가는 그물을 뜻한다. 곧 ‘reticulata’도 중국 용어에서 유래했던 것이다.

다음에는 동정귤과 관련된 학명을 추적해보자. 동정귤은 ‘Citrus reticulata (Blanco) var. erythrosa H.H.Hu’라 표기한다. 이는 동정귤이 감귤나무의 변이종(變異種)이므로 그 원래 학명에 변종을 뜻하는 variety의 약어인 ‘var.’, 또한 열매가 붉은색을 띠므로 적색을 의미하는 ‘erythro’, 게다가 명명자인 중국 식물학자 후시엔쑤(Hu Hsien Hsu)의 첫 글자를 따서 ‘H. H. Hu’도 덧붙인 것이다. 또 다나까(田中)도 명명했기에 ‘C. erythrosa Tanaka’ 또는 ‘C. reticulata var. erythrosa Tanaka’라 표기하기도 한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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