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움’의 회복을 위하여
‘~다움’의 회복을 위하여
  • 제주일보
  • 승인 2016.12.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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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수. 시인 / 문화기획가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란 한마디로 사람들을 제 자리에서 역할에 충실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움’의 섭리는 정치를 떠나서 ‘상인은 상인답게, 농민은 농민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등으로 더 넓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움’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성립하려면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이 있어야 한다. 즉 ‘무엇이 임금다운 것이냐’, ‘무엇이 신하다운 것이냐’, ‘무엇이 아버지다운 것이냐’로부터 ‘무엇이 상인답고, 무엇이 농민다운 것이냐’ 등 수많은 질문과 기준이 정립돼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적용법이 다르면 수많은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러한 기준을 관통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는 있지 않을까. 나는 ‘허삼관매혈기’라는 소설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이거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를 산 허삼관의 일대기에서 ‘아버지다움’이 무엇인지를 느꼈고 그러한 ‘아버지다움’의 밑바닥에 흐르는 원천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삼관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를 원래 아버지에게 돌려 보내려고 한다. 자신의 부인에게도 온갖 원망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버리고 싶었던 아들을 위해서 피를 팔아(돈을 받고 헌혈을 하는 것) 약을 사 먹이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한다. 그 아들이 이웃집 아이를 때려서 합의금이 필요하자 다시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하고, 그 아들을 위해 피를 파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데도 불구하고 큰 병에 걸린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나흘에 한 번 꼴로 피를 팔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서 자신의 부인이 ‘기생’이라는 무고를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로에 세워져 욕을 먹을 때도 몰래 밥을 날라다 주며 보듬어 안는다. 허삼관은 실수도 하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우스꽝스런 모습도 보여주고, 사소한 것에 화를 내고 어쩔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며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나가는 인물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미어졌다. 그렇지.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아버지답게’ 살았고 그 중심에 자식들이 있었구나. ‘자식인 나는 자식다웠던가’라는 질문을 던지다 목이 메고 말았다. 허삼관이 그러했듯, 아버지니까 살아야 되는 삶, 즉 ‘아버지답게’ 살아갔듯이, 나는 자식이니까 살아야 되는 삶, 즉 ‘자식답게’ 살았던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는 당위(當爲)의 삶이 지니는 가치를 제시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의 문제이다.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모든 관계는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이득을 위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할 때, 그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철면피(鐵面皮)’가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소외(疏外)시켜 자기소외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자기가 가진 기준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오만에 빠져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불행에 빠지게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다움’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자세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군자는 나아갈 때 나아갈 줄 알아야 하고, 물러날 때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 또한 ‘~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적 자세일 터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의 정신이 되살아나, 우리 사회의 어려움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나 그립다.

제주일보 기자  hy0622@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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