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이 아름답다
타협이 아름답다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2.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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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작가 / 칼럼니스트

[제주일보] 타협(妥協)은 어떤 일을 서로 양보하여 협의하는 것이다. 인민과 인민 대표자들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생긴 정치적 공백 속에 극우파의 책동으로 세상이 취약해지면, 이를 막기 위해서 중간계급을 조직해 인민의 동맹군으로 삼아야 한다. 바로 타협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촛불행진’과 다른 행진 ‘친박연대’의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을 위해 중간계급이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날 선 비판을 앞세우고 앞으로 나간다면그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닐까? ‘촛불연대’가 먼저 성숙한 자세를 보일 수도 있다.

1930년대 시카고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한 알린스키(Saul Alinsky, 1909~1972)는 ‘래디컬: 급진주의자여 일어나라’(Reveille for Radicals, 1946)에서 ‘인민(people)의 압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불꽃, 에너지, 생명’이라며 ‘민주주의의 유일한 희망은 더 많은 인민과 집단이 의사를 표현하고 그들의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빈민과 흑인 등 사회적 약자 해방을 위한 지역사회 조직화(community organizing)의 선구자요 사회운동가 알린스키는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의 사고와 정치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70~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미국 참여민주주의의 사상적 뿌리 알린스키는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인민의 조직화가 필요하고, 조직화를 통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참여이자 민주적인 활동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진보를 경멸했다. 진보적 활동가라면 대중이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늘 성찰해야 하며 ‘상대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진보의 언어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진보활동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협이 우선이다.

알린스키는 현재 한국 사회에도 충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만 멈추게 된다. 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여야 정치권은 중대사를 처리할 때 상대방에 대하여 ‘강공(强攻)이냐 타협이냐’를 놓고 연일 싸움판이다.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도 마찬가지다. 강공으로 나가 일이 뒤틀렸을 때 책임 소재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에 휩싸인다.

한국정치는 ‘정체성’과 ‘선명성’을 아름다운 단어로 여기는 반면 ‘타협’과 ‘절충’을 더러운 단어로 여긴다.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 싸웠던 주요 이슈와 노동자와 사주가 대립하는 노사갈등, 재벌과 중소기업의 먹고 먹히는 갈등구조 등 타협이 필요한 곳에 대화는 막혀 있다. 타협을 아름다운 단어로 여기기 위해서는 승자독식 체제를 바꿔야 한다. 그걸 바꾸는 일 역시 타협을 필요로 한다. ‘타협은 아름답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풍성한 사회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늘 보수파의 언어폭력에 시달려 왔다.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들이 소통의 셔터를 내려버리는 폭력적 언어들이다. 그렇다고 몰지각함에 대응할 필요는 없다. 날카로운 풍자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그것도 아니면서 ‘쌍욕’을 진보의 언어라며 늘어놓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에서 권력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수백만의 함성 속에 진행되고 있는 극적인 상황이야말로 알린스키가 얘기한 바로 그 혁명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알린스키는 인민 대중의 참여, 이익, 행동의 질서정연한 전개, 곧 ‘질서정연한 혁명’을 거부하면 두 가지 끔찍한 대안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하나는 무질서하고 갑작스럽고 폭풍 같은 유혈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대중적인 토대가 몹시 취약해져서 불가피하게 독재에 이르는 것이다. 질서정연한 혁명은 인민이 점진적으로, 그러나 비가역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시민으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이다.

이 또한 숱한 시련과 시행착오 끝에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 혁명의 진화에 어울리는 비유 또는 예언일 수 있지 않을까.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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