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본(善本)과 집값
선본(善本)과 집값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2.0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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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일보] 예나 지금이나 수업시간에 필기를 잘하는 친구의 노트는, 나 같이 게으른 학생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리라. 하물며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결강과 휴강이 잦았던 1980년대엔 더욱 그랬다. 그 시절 우리 과 동기생 가운데 ‘교수님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필기를 한다는 찬사를 받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필기는 우리들에게 시험 전에 꼭 확보해야 하는 소중한 필사본(筆寫本)이었다.

나중에 그녀의 노트는 수 없는 전승을 거쳐, 과 후배들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선본(善本)’의 반열에 올랐다. 다시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필사본이 여전히 과에서 선본으로 통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출현했을 수 많은 다른 필사본들을 무력하게 만든 그녀의 공력은 우리 과의 전설이 되었다.

어떤 책이 오랜 시간을 두고 전해져 내려오다 보면, 서로 다른 다양한 판본이 전래하게 된다. 그 중에 세밀한 교정과 출판 과정을 거쳐서, 다른 판본에 비해 우수한 판본을 선본(善本)이라고 한다. 따라서 시대를 불문하고 책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본을 가장 선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청나라 말의 4대 명신(名臣) 가운데 하나인 장지동(張之洞,1837~1909)도 선본은 첫째로 빠지거나 삭제한 부분이 없는 책(足本)이고, 둘째로 정밀한 교정과 주석을 거친 책(精本)이며, 세째로 오래 전에 간행되거나 베낀 책(舊本)이라고 정의하면서, 초학자(初學者)가 책을 살 때는 선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을 교정하는 것은 먼지를 터는 것과 같아서, 하면 할수록 교정할 것이 나온다”고 했던 중국 송대의 문학가이자 사학자인 송민구(宋敏求,1019~1079)는 장서가 3만여 권이나 되었다. 그는 그 많은 장서를 모두 3~5번씩 교정을 하여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장서를 선본으로 여겼다.

그 시대의 사대부로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춘명방(春明坊)에 사는 그의 집 근처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모두 그의 장서를 빌려보기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춘명방의 집값은 항상 다른 지역의 배가 넘었다고 한다.

제주살이 이주 행렬과 투자 열풍으로 인한 부동산 폭등을 우려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좋은 책을 많이 소장한 장서가와 이웃이 되기 위해 이사를 감행한 송대의 사대부들. 그들로 인해 주변의 집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곱절이 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집값보다 더 중요한 게 많은 선본을 소장한 장서가이기 때문이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춘 우리 제주에 “선본을 많이 소장한 장서가”(허울만이 아닌 실속있는 소장품을 갖춘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와 같은 문화적 인프라가 더해진다면, 책과 문화를 사랑하는 이 시대의 사대부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이상향이 되지 않을까. 부동산 폭등으로 오른 집값으로만 따지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 제주이기에...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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