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넌 재일제주선인들을 그리며
바다 건넌 재일제주선인들을 그리며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2.0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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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우도초·중학교장 / 수필가

[제주일보] 선인들이 애써 쌓아 놓은 나라의 품격이 흔들리고 있다. 고난을 극복할 지혜가 과거 속에 숨어 있다는 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들린다. 국익을 위해 미국의 트럼프를 만난 일본의 아베정권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우라고도 한다.

현재의 재일교포 수는 일본귀화 등으로 점차 줄어들어 50만명 정도이고 제주 출신이 9만여 명이라 한다. 전국 인구분포에서 제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100분의 1도 안 되는데 유독 일본에 제주의 후예들이 많은 이유가 궁금하다.

재일제주인 1세들은 학업을 위해 건너간 이도 있겠지만 일제의 침탈로 더욱 궁핍한 생활을 하던 중 정치사회적 혼란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인들이 꺼리는 유리, 금속, 고무, 방직 공장 등지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었을 것이다.

1922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기미가요마루(君大丸)는 제주와 오사카 간의 정기여객선으로, 제주 전역의 도민을 대상으로 일본이주를 부추기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1923년 도내인구 20만9060명 대비 1만381명이었던 재일제주선인은 1927년 21만508명 대비 3만505명, 1934년 18만8400명 대비 5만45명으로 그 수가 급증했다.

이런 영향으로 오사카에 제주촌이 형성되어 2세들을 위한 교육기관들이 들어서고 그 중 우도 출신 이봉춘 등이 1936년에 비밀리에 설립한 성심야학교가 유명하다.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뒤로 하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야 했던 제주선인들. 제주의 마을 중 재일동포의 지원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재일제주선인들은 온갖 수모와 풍상을 겪으면서도 후손과 고향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만리타향 일본에서 청춘을 불사르며 자수성가한 재일동포 1세대의 입지전적인 삶을 엿보자.

배우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내 마음의 풍금(1999)’의 배경이 되었던 1960년대 초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추어 동무들과 동요를 따라 부르던 그 시절. 음악시간이 되면 학교에 하나밖에 없는 풍금을 옮기느라 우리들은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학교방문에서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최정숙 초대 교육감은 열악한 교육재정 속에서도 학교에 풍금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운동이 결실을 맺어 도내 모든 초등학교 교실에 풍금이 배치될 수 있었다. 그 운동 중심에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출신인 사업가 안재호(1915~1994)를 비롯한 재일제주선인들이 있었다. 특히 안재호는 일본에서의 재계순위가 24위에 들 정도로 큰 부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가시리에서 자라기도 한 나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랑스러운 제주선인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을 넘어 흠모의 대상으로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또한 재일제주인 1세대들은 해방 전후 학교 신축, 마을회관 건립, 도로포장 등 지역개발사업과 교육사업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350만여 본의 감귤묘목 기증은 오늘의 제주도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60년대부터 제주도 전역에서 재배된 감귤은 대학나무가 되어, 제주경제의 기반을 다지게 한 견인차이기도 했다. 이들이 보여준 도전정신과 희생정신 그리고 나눔의 삶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흠모의 정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개인이, 사회가,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처럼 우리의 롤모델이 되는 선인들을 찾아 만나야 한다. 자식은 부모와 조상을 롤 모델로 삼아 살아갈 것이고, 사회는 역사적 인물을 롤 모델로 삼아 품격 있는 사회와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의 국난 속에서 나는 자식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는 롤 모델이 되고 있는지 자성해 본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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