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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두리 달력'도 새해엔 쓰레기일 뿐이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 승인 2016.12.04

[제주일보=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모든 게 다 부족했던 시절에 자라난 세대들은 아까운 게 많다.
쉰 보리밥도 버리지 않고 ‘쉰다리’로 먹었고, 신문지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사용했다. 요즘에도 빛깔좋은 포장지나 한 번 쓴 대형봉투 등을 못 버리고 구석구석 쌓아둔다. 딱히 쓸데가 없어도 아까와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달력도 그렇다. 달력은 김광규의 시처럼 세밑에 “우리의 옛 사랑이 피를 흘린 곳”을 찾아 “돌돌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다녔던 아까운 것이었다.
달력은 세밑의 상징이었다. 세모가 되면 직장인들은 달력을 구하느라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국회의원들은 지역구민들에게 한 장짜리 연력을 만들어 돌렸다. 그러나 근사한 그림이나 사진이 담긴 12장짜리나 365일 하루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은 구하기가 힘들었다. 12장짜리는 종이가 좋아 교과서나 참고서를 싸는 데 썼고, 일력은 얇아서 화장지로 쓰기 안성마춤이었다.

▲달력의 용도는 참 다양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이나 데이트 날짜를 쓰고, 어른들은 제사 등 집안의 기념일을 표시하고, 전화번호도 메모하고 돈을 빌려주거나 받은 날짜, 공과금 수납일도 적어 놓았다. 수첩과 가계부, 일기장의 역할은 모두 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력의 효용이 떨어졌는지 기업체들이 달력 제작에 무관심하거나 아주 소량만을 홍보용으로 제작한다. 그래서 올해도 근년과 다르지 않게 달력 구하기가 ‘별따기’ 됐다고 한다.
세밑에 좋은 달력을 끼고 다니려면 어느 정도 구매력을 가지고 있거나 활동력있는 유지 정도는 되어야 한다. 신분을 상징하게 됐다는 말이다. 그래서 달력을 구하지 못하고 서점에 사러가는 사람은 쓸쓸하다.

달력을 사러가는 사람만 그러랴.
“달력 좋은게 있으면 달라”는 이웃의 부탁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없기는 매한가지다. 세밑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달력을 끼고 가는 모습은 이제는 이 거리에서 더 이상 볼 수없는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다.

▲2016년 달력은 열 한 장이 뜯겨져 나갔다. 이제 달랑 한 장이 남았다. 당연히 가볍게 보여야 할 터이지만 그렇지 않다.
둔중한 무거움이 12월 달력에 자리잡고 있다. 이 무거움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서 오는 걸까?

사실 올 한 해는 정말 버거웠다. 삶의 무게가 이처럼 사람들의 어깨를 누른 적이 없었다. 봄에서 여름까지 온갖 대란이 시리즈물처럼 연속 상영으로 달려와 사람들의 가슴을 후비고 팠다.
돈 없는 가장은 전세난에 몸부림쳤다. 하룻 밤 자고나면 전세 값이 오르더니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버는 돈이 쥐꼬리인 가장들은 내 집 장만의 꿈을 잃고 가슴이 황량해졌다.

그 찌는 여름을 겨우 넘기고 가을이 오자, 최순실이라는 희대의 아줌마가 거의 매일 TV에 나와 후빈 가슴을 내리치고 난도질하는게 아닌가. ‘국민 행복’을 떠벌였던 정부는 오간데 없고, 분노와 좌절이 넘치는 밤거리는 아이들이 켠 촛불이 밝혔다.
올 한 해 뜯어져 나간 달력 열 한 장에 쓰여진 기록들이다.

▲“금테두리까지 둘러 멋있게 만든 달력이라도 새해가 되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2월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한 말이다.
시대가 바뀌면 모든 게 바꿔야지 예전에 썼다고 올해도 쓰겠다면 그건 헛수고라는 얘기다. 맞는 말이다.

헌 달력은 과거 책 덮개로 쓰고 일력은 화장지로도 썼지만 이젠 가지고 있어봐야 쓰레기일 뿐이다.

재고로 남은 헌 부채를 버리지 않고 모아둔 부채장수와 헌 달력을 버리지 않고 모아둔 달력장수가 있었다.
이듬해 부채 장수와 달력장수가 장사를  어떻게했는지는 말 안해도 다 안다. 체코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겨울이 우리에게 묻는 날이 있으리라, 여름에 무엇을 했느냐고”

오는 봄이 우리에게 묻기 전에 이 겨울에 국민이 할 일이 있다.

‘금테두리 달력’도 새해엔 쓰레기 일 뿐이다.

아까와 할 이유가 하나 없다.

 

부영주 주필·편집인/부사장  boo4960@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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