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 조선 때 '귀한 대접'…물량 없어 임금도 "매우 절실" 안달
감귤, 조선 때 '귀한 대접'…물량 없어 임금도 "매우 절실" 안달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1.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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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5>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4)
천연기념물 제523호 ‘제주 도련동 귤나무류’-병귤나무(사진 왼쪽), 제주 상납의 감귤류 품목 관련 기록(‘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제주목조·사진 오른쪽).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일보] 제주 감귤은 조선시대 들어와 용도가 다양해졌고 쓰임새도 세조가 “매우 절실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중앙정부는 원하는 물량을 채우지 못해 제주의 민가에서까지 감귤을 거둬 민폐를 자주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정부는 제주 이외의 곳으로 감귤생산지를 확대해보려는 정책을 줄곧 추진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던 것 같다.

제주 감귤의 용도와 쓰임새가 다양·절실해진 예의 하나로 약재로서도 상납되기에 이르렀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조선 정부는 지방에서 채취·상납되는 약재를 심사·감독하기 위해 14곳에 심약(審藥)을 파견했다. 이 중 13곳은 감사(監司), 혹은 병사(兵使)의 소재처이고, 나머지 1곳이 제주목이었다. 제주지역은 일반 행정단위 중 유일하게 심약을 뒀다. 이렇게 된 데는 감귤이 제주에서만 났고, 또한 약재로서의 효능이 꽤 알려진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653년(효종 4) 편찬의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약은 제주목으로 와 ‘약국(藥局)’의 감독관으로 근무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제주목에서는 각종 약초를 중앙정부의 각 관부에 상납했다. 이들 약초는 제주목 심약의 심사·감독을 거친 후 중앙정부로 이송됐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진상처와 감귤류 약재 품목을 보자면, 전의감(典醫監)에 ‘청피(靑皮)’ 7근과 ‘진피(陳皮)’ 2근 8냥, 혜민서(惠民署)에는 ‘청피’ 20근과 ‘지각(枳殼)’ 3근 및 ‘진피’ 25근을 바쳤다.

제주의 감귤류 약재가 왕실·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을 치료하는 혜민서에도 올라갔던 것이다.

곧, 제주 감귤의 껍질(청피)과 이를 말려 오랫동안 묵힌 것(진피), 또한 탱자나 혹은 광귤의 어린 열매를 썰어 말린 것(지각)이 국가적 공중치료의 약재로서도 이용·활용됐다고 하겠다.

이렇게 된 시기는 조선 초창기부터였고, 그에 따라 정부가 원하는 감귤 물량이 대폭 늘어났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해 조선 초부터 제주 감귤나무를 한반도 육지부로 옮겨 심는 정책을 추진해 나아갔다고 하겠다.

처음 제주 감귤나무를 옮겨 심는 일은 1412년(태종 12) 상림원(上林園) 소속 별감 김용(金用)에 의해 이뤄졌다. 상림원은 훗날 장원서(掌苑署)로 이름이 바뀌거니와, 각종 과일을 관장하던 기구였다. 김용은 제주 감귤나무 수백 그루를 전라도지역 순천 등의 바닷가 고을에 옮겨 심었다. 다음 해에도 김용이 제주 감귤나무 수백 그루를 전라도 바닷가 여러 고을에 옮겨 심었다.

중앙정부는 제주 감귤나무를 남해안지역으로 옮겨 심는 사업을 장기간에 걸쳐 여러 차례 시행했으나 열매가 맺지 않는 등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426년(세종 8)에도 호조(戶曹)에서 전라·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감귤류를 시험 재배한 뒤 사신을 보내 그 결과를 점검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 때에도 제주지역만큼의 소득은 없었던 듯하다.

한편 감귤이 경상도의 동래현과 아울러, 전라도의 영암군, 강진현, 순천도호부, 고흥현, 장흥도호부의 토산물이고 세금의 형태로 바쳤다는 의미의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옮겨 심은 감귤나무에서 중앙정부가 수세할 정도의 감귤이 맺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이들 경상·전라도 해안 지역의 감귤나무가 장기간 지속적으로 살았고 매해 안정적으로 감귤을 거둬들였다고 보기에는 의문시된다. 왜냐하면 경상도 관찰사가 1799년(정조 23) 거제, 고성, 남해의 3개 고을에 있었던 유자나무가 모두 얼어 죽었음을 보고한 예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때 제주 감귤류 나무의 한반도 육지부 이식은 수차례 시행됐음이 확인되고 있기는 하나, 한반도 육지부는 감귤류 나무가 생장하기에는 기후 등의 환경조건이 적합지 않다. 또한 좋은 결과도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된 결정적 이유는 감귤류 나무가 상록과수로서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서식지는 최저온도 -7도 이상의 온난한 지방에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김태윤 한의학&#8197;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8197;이사장

▲감(柑)과 귤(橘)의 껍질인 귤피-허준이 말한 ‘동정귤’ 원산지는?…中 둥팅산서 유입

허준은 ‘동정귤’의 껍질을 귤피라 했다. 이 동정귤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통상 ‘동정(洞庭)’은 신들의 정원이란 뜻을 갖거니와, 둥팅후(洞庭湖)를 떠올리곤 한다. 이렇게 된 데는 굴원(屈原)의 시에서 연유한 바가 클 듯싶으나, ‘동정’이란 지명이 꼭 호수만을 지칭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에는 ‘둥팅후’ 외에 둥팅산(洞庭山)도 있다.

또 기원전 ‘산해경’에서 “둥팅산에 귤이 많이 나고…구강에 있다(洞庭之山…其木多…橘…是在九江之閒)”고 했듯이, 둥팅산에선 귤도 났다. 기원전 3세기 굴원은 “둥팅후에 물결치고 나뭇잎 떨어진다(洞庭波兮木葉下)”고 했다. 이 무렵 구강은 이미 둥팅후로 개명됐는데, 이는 구강 내 둥팅산의 동정귤에서 연유했을 것 같다.

한편 5세기 발간된 ‘형주도경(荊州圖經)’을 보면, 둥팅후의 둥팅산도 쥔산(君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6세기 초 지리서 ‘수경주(水經注)’에서는 서산도(西山島)에 둥산(洞山)과 팅산(庭山)이 있거니와, 이를 둥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시 ‘둥팅산’은 타이후(太湖)에 있었던 것이다. 위응물(韋應物)도 789년부터 3년간 쑤저우(蘇州) 수령을 지낼 때 쓴 ‘위소주집(韋蘇州集)’에서 “둥팅산림 많은 서리 기다려야 한다오(洞庭須待滿林霜)”라 했다. 이때의 ‘동정’도 타이후 둥팅산을 말한다. 현재도 둥팅산은 계속 지명으로 쓰인다. 이는 서산도와 반도인 동산도(東山島)를 통틀어 칭하고 있으니, 역시 옛적과는 다른 곳의 지명인 것이다.

9세기 초반 백거이(白居易) 경우는 동정귤이 다른 곳에서 유입됐다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이로 봐, 둥팅후 동정귤은 창장(長江)의 동쪽으로부터 타이후로 유입되고, 타이후 둥팅산의 귤도 역시 동정귤이라 칭했다고 하겠다. 16세기 전반 이몽양(李夢陽)은 “둥팅산에 구름이 일어나니(洞庭有興雲)/ 타이후에 산 그림자가 물결 위에 비치지 않는다(太湖無洛波)”란 시를 썼다. 이로써 둥팅산이 타이후에도 있음이 보다 더 분명해진다. 최근 텐진중의약대학 자료에서도 현 둥팅산의 귤을 동정귤이라고 한다. 조선의 경우는 중국으로부터 동정귤이 들어왔음이 확인된다. 정조가 18세기 후반에 “동정귤을 제주에 심었다”고 했던 것이다. 요컨대, 동정귤의 명칭은 둥팅산에서 온 것이다. 그런 만큼, 허준이 말한 동정귤은 둥팅후를 거쳐 타이후로, 이어 제주로 유입된 동정귤을 지칭함이 명백하다고 하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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