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이 왕에게 진상되면 국가적 이벤트 '과거시험' 시작
감귤이 왕에게 진상되면 국가적 이벤트 '과거시험' 시작
  • 뉴제주일보
  • 승인 2016.11.1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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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의약, 그 역사속으로…<4>제주, 국내 유일의 감귤류 약초 산출지(3)
(좌) 천연기념물 제523호 ‘제주 도련동 귤나무류’-산귤나무, (우) 감귤봉진(탐라순력도 수록 화폭)

[제주일보] 제주 감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국가적 용도가 다양하고, 사용처도 늘어났다.

김일우 문학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제주 귤이 매해 상납됐던 시기가 고려시대 1052년(문종 5) 이전부터였음은 뚜렷이 드러난다. 이후 조선정부는 초창기부터 제주 감귤을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한편 조선은 고려에 비해 훨씬 중앙집권화가 진전된 사회였다. 중앙정부의 지방 장악력이 크게 커졌던 것이다. 수세행정도 체계적으로 정비되면서 수세품목과 그 양도 훨씬 증대했다. 제주 감귤의 경우도 조선 초기부터 이뤄졌던 세제개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주에서 상납하는 감귤의 양이 이전에 비해 훨씬 늘어나게 됐던 것이다. 이로써 제주 사람은 국가적 소요의 감귤 물량을 대느라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여튼 제주 감귤이 상납되면, 그 용도가 실로 다양·다기했다. 우선 제주 감귤은 신과 신위(神位)에 바치는 천신용(薦新用), 곧 제사상에 올리는 제수(祭需)로 쓰였다. 제주 감귤은 역대의 왕 및 왕비와 함께, 추존의 왕과 왕비도 모셔서 종묘라 일컫는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올렸던 것이다.

통상 신위에 바치는 물품은 제철 과일이나 농산물을 썼는데, 제주의 감자(柑子)가 조선이 들어선지 4년밖에 안 되는 1396년(태조 5)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1413년(태종 13) 종묘의 10월 망제(望祭) 때부터는 제주의 귤과 유자(柚子)도 올렸다. 감귤류 열매가 늦가을 제주 감귤나무에서 익으면 따서 진상케 하고는 종묘의 천신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외에 제주 감귤은 점차적으로 중앙·지방관아에서 행하던 대부분의 제사 때도 쓰이게 된다.

감귤은 명(明)나라와 일본 및 류큐(琉球, 오끼나와왕국) 등에서 찾아 온 사신들에게 접대용으로도 내놓았다. 제주 감귤은 왕이 외국 사신들에게 내리는 귀한 선물로도 쓰였던 것이다.

제주 감귤은 신하에게 왕의 하사품으로도 사용됐다. 특히 왕이 제주 감귤을 성균관(成均館) 학생에게 나눠주고 과거를 봤던 것이 하나의 관례로 정착되기도 했다. 이 과거는 황감제(黃柑製) 혹은 감제(柑製), 곧 ‘황금빛 감귤과거’라 일컬어졌던 것이다. 만일 제주 감귤이 없게 되면 황감과 황태(黃太)에서 ‘황’자의 뜻만을 취해 황태를 대신 나눠주면서 과거를 치르기도 했다.

황감제 수석합격자는 과거급제자와 똑같은 자격을 줘 전시(殿試), 즉 왕이 과거장에 친히 나와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된 과거의 최종 고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제주 감귤이 왕에게 진상되면, 조선시대 지식인 거의가 주목하던 과거가 국가적 이벤트로 벌어졌던 것이다. 이는 1564년(명종 19) 이래 300여 년 동안 지속됐다.

제주 감귤은 한약재(韓藥材)로도 쓰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1454년(단종 2)에 간행됐다. 여기에는 제주의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서 중앙정부에 상납했던 감귤류 품목이 나열되고 있다. 이들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감자(柑子), 유자(柚子), 유감(乳柑), 동정귤(洞庭橘), 금귤(金橘), 청귤(靑橘), 산귤(山橘)이고 다른 하나는 진피(陳皮), 청피(靑皮), 지각(枳殼, 광귤), 지실(枳實)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감귤류 나무의 열매를 뜻하거니와, 그 용도가 과일 등으로 먹는데 있다. 반면 후자는 감귤류 나무의 열매이기는 하나, 과일로 먹는 것이 아니고 열매 부위의 껍질이나 혹은 어린 열매 썬 것을 말리는 등의 처리과정을 거친 뒤 한약재로 쓰는 것이다. 이로써 제주 감귤류 나무의 열매가 약초로서 취급되는 한편 매해 정규적으로 한약재로서도 중앙정부에 바쳐졌음이 처음 확인된다.

조선시대는 제주 감귤의 쓰임새와 관련해 세조의 경우는 제주도안무사(濟州都安撫使)에게 직접 말하기를 “매우 절실하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감귤이 나라 안에서는 오직 제주에서만 났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원하는 감귤 물량을 채우고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제주 이외의 곳으로도 감귤 생산지를 확대해보려는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됐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감(柑)과 귤(橘)의 껍질인 귤피…“동정귤·황귤이 최상품 귤피?”

김태윤 한의학 박사·(재)제주한의약연구원 이사장

‘좋은 귤피’는 “잘 익은 감과 귤의 껍질 가운데 맵고 쓴 게 최상품”이라 했다. 근데 왜 허준과 이시진은 귤피의 최상품을 각각 동정귤(洞庭橘)과 황귤(黃橘)로 거론했을까. 이와 관련해 중국·한국의 기록을 살펴보자.

8세기 초반 중국의 진장기는 귤 품종 중 주귤(朱橘)을 가장 앞세웠고, 12세기 초반 한언직은 황귤을 상품이라고 했다. 16세기 후반 이시진도 황귤, 주귤 순으로 등급을 매기면서 황귤을 귤피로 꼽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황귤·주귤을 상품으로 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세조실록’에서 “여러 과일 중…동정귤을 최고라 한다(諸菓之中…洞庭橘爲上)”는 기록이 보인다. 정조도 제주 동정귤을 “洞庭佳種又幽鄕(동정귤 좋은 종자 심어 또 머나먼 고장에서 자란다)”라고 읊었듯이, 동정귤을 최고 상품으로 쳤다. 20세기에 발간된 ‘중약대사전’에서는 황귤이란 품종을 빼놓고는 광둥성 차오저우의 복귤(福橘, C. tangerina), 저장성 둥팅산(洞庭山)의 동정귤인 주귤(C. erythrosa), 온주밀귤(C. unshiu), 유귤(乳橘, C. kinokuni) 순으로 거론하고 있다. 다시 옛 기록을 보면 6세기 초반 도은거는 “귤은 창장(長江)의 서쪽보다 동쪽이 좋다(以東橘爲好 西江亦有而不如)”고 했다. 또 한언직은 “원저우(溫州) 귤이 최고다(已不敢與溫橘齒)”라고 기술했다.

한편 ‘차오저우’ 지역은 ‘원저우’보다 서쪽이면서 훨씬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곧, ‘차오저우’의 귤이 ‘원저우’의 것보다 당도(Brix)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는 “橘化爲枳”(귤화위지)라는 고사성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시진의 경우도 “귤피는 광시·광둥성의 것이 장시성보다 낫다(橘皮…以廣中來者爲勝江西者次之)”고 했다. 결국 허준과 이시진은 각각 자신이 구할 수 있었던 산물(酸物) 중 알맹이가 최고 맛있는 귤을 택해 귤피의 최상품으로 쳤을 것이다. 곧 ‘좋은 귤피’는 알맹이가 맛있는 잘 익은 감과 귤의 껍질 중 맵고 쓴 걸 최상품으로 내세웠다고 하겠다.

뉴제주일보  cjnews@jejuil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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